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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Nov 18. 2022

천 냥 같은 말 한마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 한마디에 진짜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누군가의 찰나를 천 냥 같이 귀한 순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경험으로 안다.




몇 년 전 일이다. 짧은 턴 비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도착한 목적지에서 잠시 문제가 생겨서 도하로 가는 비행기가 연기되었다. 크루들은 비행기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기다리는 내내 돌아갈 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몇 시간씩이나 연기된 비행기에 탑승할 손님들의 짜증지수와 컴플레인은 안 봐도 짐작 가능하니 말이다.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문제는 해결되었고, 우리는 손님을 태우고 도하로 돌아가게 되었다.


웃자. 상냥하자. 비행기가 연착된 것에 대한 컴플레인에는 정중히 사과드리자. 무조건 신속하고 정확하게 서비스를 끝내자.


승무원들은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손님들을 맞이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비행기가 연착된 경우에는 평소보다 더 신속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요구된다. 게다가 이런 날은 조그마한 실수도 엄청난 컴플레인이 되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해야 한다.


그렇게 보딩이 시작되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손님들의 기분을 살피며, 긴장된 상태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손님 한 분이 나에게 오시더니 말씀하셨다.


“비행기 3시간 연착돼서 힘들었죠? 승무원들은 비행기 안에 계속 있었다고 들었는데. 안 피곤해요?? 오늘 승무원들 전부 고생하네요.”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비행기 연착으로 너무 화가 날 것만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승무원들을 걱정해 주시는 손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너무 감사했다. 갑자기 오늘의 어려운 비행도 힘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 손님의 덕이었을까. 나는 그날 서비스를 잘 끝마쳤고, 무사히 도하로 돌아왔다.




프리미엄 크루로 일을 하기 시작한 초반이었다. 이코노미에 비하면 손님 수는 현저하게 적지만 서비스가 많은 프리미엄 캐빈의 초반 적응은 쉽지 않았다.


그날 그 비행도 만석 비행에 정신이 없었고, 너무 바빠서 비행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서비스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을 했다. (너무 바쁘면 목이 마르다는 사실도 잊고 일을 하게 된다.)


장거리 비행이었던지라 식사 서비스가 끝나자마자 턴 다운 서비스가 이어졌고 (장거리 비행의 경우, 프리미엄 손님의 좌석에 매트리스를 깔아 침대를 만들어 드리는 서비스이다. 턴 다운 서비스는 비행시간마다 상이하다.) 나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치우고, 매트리스를 까느냐고 이쪽저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매트리스로 침대를 만들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내게 한 손님이 물어보셨다.

“그런데, 밥은 먹었어요? 밥은 먹고 일하는 거예요?”


“이따가 먹으려고요.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손님 많아서 바빴죠? 밥 꼭 챙겨 먹어요.”


온화한 미소와 함께 건네지는 손님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뭔가 울컥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날따라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크루들과 손발도 맞지 않아 일이 더 힘들게 느껴졌었다. 만석 비행이라 부담되는 마음에, 프리미엄 캐빈 일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터라 종일 긴장한 상태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손님의 다정한 물음 한마디에 갑자기 타악 풀리면서 괜스레 서러워졌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중년 손님의 온화한 미소를 보니 부모님도 보고 싶고. 갑자기 모든 게 서러워져서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그 손님에게 내 또래만 한 딸이 있었던 것일까, 손님은 일하는 나를 안쓰러움과 인자함이 담긴 눈길로 지켜봐 주시며, 비행 내내 내 안부를 물어봐 주셨다. 바쁘고 정신없는 비행이었지만, 나는 손님의 미소와 친절함에 힘을 얻어서 비행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는 순간까지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대중교통, 편의점, 식당, 가게들, 일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하루 동안 만나게 되는 그 사람들의 하루를, 순간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고운 말, 예쁜 말을 사용하면 어떨까?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어렵다면, 시작은 간단하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이 4 문장이면 시작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면 된다.


당신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천 냥보다 더 귀한 순간을 선사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순간이 반드시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혹시 아는가, 당신이 너무 힘들고 지친 날, 누군가의 따뜻한 한마디가 당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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