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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Dec 18. 2022

비행기의 숨겨진 공간, 크루 벙커

비행기에는 기장님과 부기장님의 공간인 cockpit 칵핏(=기장실, 우리는 Flight deck이라고 부른다.), 기내 서비스의 음식을 준비하는 갤리(=비행기 내 간이부엌), 손님들이 앉아계시는 캐빈(=기내)처럼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중 일부 비행기에는 숨겨진 비밀 공간도 있는데, 그곳은 바로 ‘크루 벙커’이다.


매뉴얼상의 공식 명칭은 Cabin Crew Rest Compartment 일명 CCRC, 승무원들끼리는 편히 ‘벙크/벙커’라고 불리는 이 비밀스러운 공간은, 일반 승객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비행기 기종마다 위치한 곳이 살짝 다르고, 그 생김새도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비행기 맨 뒤쪽에 위치해 있다.


가끔 캐빈의 맨 뒤쪽 즈음에 자리하신 승객분들께서 본인의 머리 위의 위치한 짐칸이 열리지 않는다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 부분은 오버헤드 빈처럼 생긴, 크루 벙커의 비상탈출구이다. (겉보기에는 똑같이 짐칸처럼 생겼지만, 손잡이가 없다.)




크루들은 비행기 내에 휴식이 정해져 있는 경우에만 벙커를 사용할 수 있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 겨울철 아시아 섹터처럼 장거리 비행의 경우, 승무원에게 일정 시간의 휴식시간을 주고, 그 시간 동안 크루들은 벙커에서 잠을 잔다. 짧은 경우는 2시간 남짓부터 길게는 5시간이 좀 넘는 시간까지 다양한데, 이는 비행거리에 따라 다르며, 사무장님이 시간과 팀을 나누어서 휴식을 지정해 주신다.


크루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한다. 곱게 단장했던 머리를 모두 풀어서 편하게 자는 크루도 있고, 필로우 미스트나 온수 찜질팩 등을 이용해서 숙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엄청 푹신푹신한 잠옷을 입기도 하고, 간단한 잠옷을 입는 경우도 있다. 잠을 자러 가기 전에 밥을 먹고 가는 크루도 있고, 굶고 가는 크루도 있다. 장거리 비행의 경우 벙커에서 잘 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체력 충전이 되기 때문에 본인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주어진 시간 안에 빠르게 잘 쉬는 것이 포인트이다.


개인적으로는 잠옷만 갈아입은 후, 화장과 머리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미라처럼 잔다. 머리를 풀어서 자면 더 편할 걸 알지만 일어나서 머리를 정돈하는 게 더 귀찮으므로, 그냥 잔다. 옆에는 인공눈물 한 개와 (기내는 건조하지만, 벙커 안은 더 건조하다.) 알람을 세팅해 둔 핸드폰을 두고 푹 잔다. 아, 수면 양말은 잊지 않고 신는다. 벙커는 늘 춥다. 특히 벙커가 냉장고 급으로 추울 때에는 온수 찜질팩을 준비해 가기도 한다.




나는 주로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려고 하는 편인데, 기내로 돌아가기 전에 그루밍을 다시 체크해야 하고, 간단히 식사까지 하고 가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일어나서 보시락 보시락 거리면 침대끼리 매우 가까운 벙커의 특성상 다른 크루를 깨울 수 있기 때문에 기상 시 소음에 매우 주의하며 일어난다.


특히 일부 비행기의 경우 제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을 만큼 벙커 높이가 작기 때문에 잘못 움직이면 여기저기 쿵쿵 박으면서 소음을 내기 때문에 조심히 움직여야 한다. (참고로 내 키는 168cm인데, 어떤 기종의 경우는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고개를 옆으로 45도 기울여야 할 정도로 작다. 나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더 발달한 크루들은 벙커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하기도, 걱정되기도 한다.)




처음 벙커에서 잠을 자던 날은 너무 낯설고 좁게 느껴지기도 해서 꼭 관 속에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비행기 뒤쪽, 손님들 짐칸 높이쯤에 위치해 있는 벙커의 특성상 난기류가 더 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혹시나 늦잠을 자는 건 아닐까, 다음 서비스는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못 자기도 했다. 이제는 뭐 익숙해져서 금방 잠이 들긴 하지만, 아주 가끔씩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뒤척이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에 느꼈던 답답함보다는 나름의 아늑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피곤해서 반 좀비 상태로 쉬러 갈 때는 공간의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나름 큰 벙커는 넓게 나온 것도 있어서, 나는 미국 비행이 나오면 기종을 먼저 살핀다. 좋은 벙커가 있는 기종이 걸리면 ‘오예!’를 외치고 좁은 벙커의 기종이 걸리면 ‘역시나...’ 소리가 나온다. 그래도 뭐, 나에게 선택권은 없으니 뭐가 걸리던 가기는 간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그나마 희소식은, 최근에는 회사에서 크루들의 수면 질 향상을 위해 벙커용 이불과 침대커버를 새로 바꿔주었다는 것이다. 예전 것은 좀 추웠는데, 이제는 통통하고 따뜻한 이불과 함께 뽀송뽀송한 침대 시트도 같이 제공된다.


장거리 비행에 벙커에서 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또 지내다 보면 적응도 되고, 나름의 방법으로 잘 쉬는 법도 터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언젠가는 승무원 생활의 추억이 한 자락이 되겠지.라는 생각도 들면서 말이다.


오늘도, 비행기 끝자락 좁은 벙커에 지친 몸을 뉘이며 희망해본다.

다음에 새로운 비행기를 만든다면, 이거보다 넓은 벙커를 만들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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