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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룬 Jan 05. 2022

늦게 배운 커피에 지갑 새는 줄 모릅니다 下

정성스레 내린 핸드드립도 요리라면 요리

 나는 커피를 마신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뜨거운 커피를. 카페에서 마실 때 1순위 선택은 따뜻한 핸드드립, 집에서 마실 때는 핸드드립이 유일한 선택지다. 소위 말하는 ‘홈 카페’만큼 거창하지 않다. 그저 직접 내려 마실 뿐이다. 그리고 커피를 내릴 때는 항상 누군가를 떠올린다. 시부야역 근처 골목에 있는 어느 끽다점의 마스터를.




  오늘도 집에서 커피를 마신다.  현실은 집 안, 나는 파자마 차림이지만, 그래도 핸드드립하는 순간은 늘 시부야 어귀에 있는 끽다점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다.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별것 없다.


 ① 주둥이가 길고 좁은 발뮤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인다. (핸드드립용으로 딱이다.)

 ② 동 소재의 칼리타 계량스푼으로 원두를 두 번, 푸조 그라인더에 넣은 다음 손잡이를 돌려 원두를 간다.

③ 드립 스탠드에 드리퍼와 드리퍼에 맞는 종이 필터를 얹고 밑에 찻잔을 세팅한다. (대개 도기로 된 멜리타, 칼리타 웨이브를 사용한다.)

④ 끓는 물을 부어서 종이 맛을 제거하고 컵을 데운다.

⑤ 갈아두었던 원두를 종이 필터에 쏟고 대강 평평하게 만든다.

아는 만큼 드립해서 마신다!


 글로 쓰니 괜히 복잡해 보이지만 커피 좀 아는 누군가가 보면 코웃음 칠 수준이다. 원두 그램 수나 물 온도를 정확히 측정하지도, 서버를 거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제일 까다로운 부분은 ‘아는 만큼’이라고 적었다. 처음 핸드드립을 시작했을 때는 온도도 원두 그램도 따져보고는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눈대중으로 끝낸다. 어차피 집에서 혼자 마실 커피인데, 어떻게 내려 먹든 무슨 상관일까. 진짜 진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전문가를 찾아가자. (약은 약사에게 커피는 바리스타에게!)


 앞서 언급했듯 내가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커피를 내리는 과정에 있다. 커피 맛은 그다음 순위다. 다만 커피를 내릴 때 너무 치열하기도 싫고 너무 대충 하기도 싫다. 너무 치열하면 여유를 즐기고자 시작한 일이 스트레스가 되고, 너무 대충 하면 기껏 산 원두의 잠재능력을 무시하는 꼴일뿐더러 나 자신을 푸대접하는 것 같아서 싫다. 그래서 ‘적당히’ 한다, 적당히.


 나에게 ‘커피 = 여유’라는 공식을 새겨준 이는 시부야 어느 끽다점의 마스터다. 마스터는 언제나 깔끔하게 셔츠를 입고 늘 같은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을 유지한다. (근데 마스터는 머리가 안 자라는 걸까? 어떻게 항상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지 신기하다.) 그리고 늘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내려준다.


 이곳을 가려고 했던 이유는 융드립 커피를 즐길 수 있어서다. 융드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 추출 방식이고 일본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종이 대신 플란넬 천을 이용해서 커피를 내리기 때문에 종이 필터에서는 한계가 있는 지방 성분까지 추출할 수 있어서 바디감이 깊고 진하다. 쓴 맛과 잡 맛은 플란넬 천이 흡수해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진하고 쓰지 않은 커피다.


 입구는 생각보다 아담했으나 입장하면서부터 코에서 느껴지는 나무 냄새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상의 나무를 사용한 인테리어에 감탄이 나온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 안내해주는 대로 착석한 다음에는 눈이 자연스레 응접실처럼 꾸며진 내부 이곳저곳으로 간다. 구경하다 보면 예쁜 영국식 찻잔이 한가득 나열되어 있는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마스터는  벽면두고 카운터석을 마주 본 채   없이 커피를 내리며 벽면에 나열된 커피잔에 담는다. 메뉴판은 손으로 적은 붓글씨가 적혀 있어 고풍스러운 매력을 뿜는다.


 항상 손님이 많기 때문에 주문을 하면 좀 기다려야 하고 융드립은 시간이 좀 더 걸리지만, 마스터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분쇄된 원두를 옮겨 담을 때는 재빠르게, 추출은 정성스레 천천히, 주전자를 제자리에 둘 때는 신속하게. 프로의 완급조절이란 걸까? 여기서 중요한 장면은 추출하는 순간이다. 마치 ‘폭탄달걀찜’처럼 부풀어 오른 ‘원두빵’에 닿을 듯 말 듯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아주 맵시 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여러 잔을 동시에 내리면서 완벽한 타이밍대로 우아하게 날아다닌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입가에 약간 미소를 띤 상태를 유지하는 점이다. 내가 본 포커페이스 중 가장 기품이 넘친다.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홀리고 말 것이다. 내가 그랬듯.

 (나중에 알았는데 블루보틀의 창업자가 이곳의 드립 커피에 영감을 받아 블루보틀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커피 맛을 보면 두 번 반한다. 나는 융드립이 워낙 내 입맛에 맞는 스타일이라서 아주 행복했고 융드립에 제대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스터의 멋과 실력에 홀려버린 나는 핸드드립의 매력에도 빠졌다. 사람이 시간 들여 손수 내려준 커피에는 특유의 멋과 정성이 들어 있다는 생각에서다. 지금도 나는 원두에 첫 물을 붓고 뜸을 들일 때 항상 마스터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마스터가 있던 가게, 가게가 있던 시부야부터 시작해 내 유학 생활, 그 속의 추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뜸을 들이는 몇십 초 동안.


 딱, 이 정도만 회상해야 한다. 한 잔에 천 엔 남짓한 커피를 몇 잔이나 사 마셨는지 생각하면 솔직히 눈물 나니까. 그래도 정성과 노하우가 담긴 핸드드립은 요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괜찮다. 지갑만 괜찮지 않았을 뿐.




 나는 여태까지 인생 커피를 두 번 경험했다.

上편에 등장한 ‘커피라는 영역을 잠금해제시켜준 커피’와 下편에서 이야기한 ‘프로의 우아한 융드립’.

 슬프게도 일본에서는 이제 융드립이 구식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구식 취급을 받는다 해도, 내 지갑이 탈탈 털리더라도, 나는 융드립을 놓을 수 없다.

 집에서는 융드립 엄두도 못 낸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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