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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Jun 13. 2023

어항

사랑에 관한 단편집


1.

쏟아 붓듯 내리는 비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써도 교복이며 양말은 늘 젖는다. 운동화 사이로 베어오는 축축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맨발에 슬리퍼 신고 등교해 학주한테 깨지기. 운동화 신고 등교해 말리느라 애 먹기. 어느 것 하나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삭은 주로 후자를 택하는 편이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흰 양말까지 따로 챙기고 운동화를 신었다.


이불과 함께 물고기에 대한 상념들도 함께 걷는다. 수금하듯. 때론 병적으로. 몸을 감싸는 공기가 찼다. 입김이 나왔다. 입은 옷이라곤 반팔 뿐인데 입에서 나오는 게 입김이면. 독감에 걸려도 하나 이상하지 않은 상태 아닌가. 비와 함께 한 계절 내내 쌓아둔 불유쾌한 기억들을 내려 보낸다. 수영을 기다린다. 얼마 전부터 둘은 등교를 함께 하기로 했다. 집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길이 어느 순간부터 겹치는데 딱 그 지점에서 만나 같이 가자고. 제안해오는 수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2.

수영의 집 근처 성당에선 새벽 6시마다 종을 쳤다. 다소 아날로그틱 하나 나름대로 꽤 낭만 있다고 생각한다. 한수영은 그 소리에 맞춰 눈을 뜨고 이불을 정리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언제쯤 아침이 힘겹지 않을까 생각한다. 잠에 들지 못하고 끙끙대던 전날 밤을 떠올리며 언제쯤 밤이 지겹지 않을까 고민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일상적인 폭력. 폭력적인 일상. 굳이 불만을 가지거나 하진 않는다. 힘겨운 거 지겨운 거 전부, 저기 지나가는 동네 개도 겪는 일이라고 여긴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는 속으로만 꼬박꼬박 한다.


집을 나서면 늘 보던 길이 나왔다. 그대로 오분 쯤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두번 꺾으면 이삭과 만나기로 한 골목길이다. 아직은 고요한 동네에 한수영 걷는 소리만 탁, 탁 울렸다. 평소엔 포장이 덜 된 도로라 그런지 걸을 때마다 시멘트 조각과 돌들이 부딪혀 구르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은 비가 와 그런지 덜했다. 머리로 기억하는 것보다 몸에 의존해 걷는 게 길 찾기에 더 쉬웠다. 얼마 쯤 갔을까. 겹겹이 붙어있는 담장 아래 흑갈색 머리가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귀에 이어폰을 낀-


"최이삭!"


비가 오는 날엔 소리가 더 울린다는데 어째 목소리는 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빗소리에 묻힌 거겠지. 더 부르기를 포기하고 빠르게 뛰다시피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들어보이는 고개. 안녕, 건네보는 인사. 빗소리가 너무 커 나머지 소리들이 전부 작게 들렸다. 등굣길이 이렇게나 소란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늘 비 와서 옥상 못 가."

"오늘 아니야. 이번 주 내내야. 내내 비 온대."

"비 오는 거 싫어."

"나도."

"빗소리 때매 귀 아파."


수영의 투정이 익숙한지 이삭은 별 반응이 없다.


3.

둘은 옥상 대신 중앙 정원에 죽치고 앉아 시끄러운 빗소리를 온 몸으로 맞기로 한다. 기말고사 시즌이 다가왔으므로 공부할 책도 함께였다. 플라스틱 지붕을 때리는 세찬 비가 영 거슬렸지만 그보다 더 거슬리는 건 역시 상대의 존재. 자꾸 건들고 싶고 놀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치만 사방이 보는 눈 천지라 그런지 또 섣불리 뭔가를 하진 못하고. 수영은 꽤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며 가끔 이삭과 옥상이 아니라 여길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비가 오지 않을 다음 중간고사가 벌써 막막했다. 그땐 무슨 수로 얠 공부시키지? 대차게 말아먹은 지난 중간고사는 이제 아득하기만 하다.


4.

하교할 시간에 맞춰 그친 비에 집까지 걷기로 한다. 수영의 집에서부터 이삭의 집까지. 그리고 다시 이삭의 집에서부터 수영의 집까지. 장마철은 세상이 어항만 같다. 눅눅하고 습하다. 비가 그렇게 내렸는데도 하나 춥지 않고 덥기만 하다. 아침에 맺혔던 입김이 꼭 착각처럼 느껴진다. 오려던 감기가 더위에 밀려 조용히 물러간다. 숨 막히는 공기를 가르며 두 개의 몸이 열심히 걷는다. 이삭이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비 올 것 같아. 수영이 맞장구를 친다. 그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러네.


"우산도 없는데 진짜 오면 어떡하지."

"편의점에 들어가서 우산이라도 살까?"

"아니, 아니야. 그냥 맞지 뭐."


수영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맨발을 응시한다.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아. 물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수영의 고백에도 물은 답하는 법이 없다. 이삭만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킬 뿐.


5.

장마철이 되면 이삭은 제가 꼭 어항 속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작년 가을에 죽어버린 애완 물고기가 떠오르는 계절이었다. 망할 센티멘탈 물고기. 대체 뭐를 못 견뎌 하룻밤 사이 물 위에 둥둥 떠버렸는지. 미안해서 차마 변기에 버리지 못하고 빌라 화단에 곱게 묻어주었다. 그날도 비가 죽어라 내렸어. 꼭 안 좋은 일은 비 내리는 날 생기지. 일종의 복선처럼.


.


한수영, 내가 말했었지. 나 예전에 물고기 키웠었다고. 두 번인가 키웠는데 두 번 다 끝이 영 별로였어. 한번은 자고 일어나보니 애가 물 위에서 숨을 쉬고 있었고 다른 한번은 어항에 금이 갔었어. 몰랐는데 계속 물이 샜나 봐. 엄마랑 여행을 갔다 돌아왔는데, 주변으론 물이 흥건하고 정작 어항은 텅텅 비어서 애가 바싹 말라 있었어. 나는 그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어.


말도 못하고 말라 갈 때 걘 내가 얼마나 싫었을까. 걔는 자기가 말라 죽을 거라 생각이나 해봤을까.


비가 오는 날엔 늘 뭐가 하나씩 나를 떠나. 아빠가 집에서 짐 빼던 그 날에도 비가 왔고 물고기 두 마리는 전부 비 오는 날 죽었어. 비가 오면 당연해지는 일이 있어. 똑같이 불행한 일도 비가 오면 그럴싸한 사연이 돼. 해가 쨍한 날, 누가 떠나면 날도 좋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며 다들 슬퍼해. 근데 비 오는 날 누가 떠나면 비가 와서 떠났다고 말해. 어쩜 날씨도 이렇게 잘 골라 떠났냐고. 난 그게 싫었어.


6.

아이러니란 그런 것이다. 불행을 더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깔리는 일종의 장치. 불행에도 정도가 있으니까. 누군가의 극적인 불행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연극이 되듯이. 그래, 생각해보면 실은 누군가 나를 떠나기 전까지 내가 걸었던 모든 걸음이 복선이었을거야. 아마 그랬을거야. 내가 눈치가 좀 없어서 못 알아챘을 뿐. 근데도 난 여전히 모르겠어. 내가 알아차렸으면 떠나지 않았을까? 아빠도, 물고기도.


.


근데 웃기지. 너를 처음 만난 날에도 비가 왔었어. 처음으로 비가 복선이 된 거야. 너를 만나라고 내 등을 떠민 복선. 나한테 비는 항상 불행의 종점이었는데, 근데 너는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나를 보러 이리로 온 거잖아. 어떻게 그랬어? 난 그게 지금도 신기해.


7.

수영은 이삭에게서 짙은 녹색을 본다. 고작 시원함에서 그치고 마는 파란 명사들에게 무안을 주리만치 지독한 서늘함은 다른 게 아니라 녹색에서 나온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녹이 슬어버린 이삭의 옆모습을 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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