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넷 교사의 죽음, 스물 하나 군인의 죽음, 누구의 죽음, 또 누구의 죽음. 세상을 바꾸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누가 죽어야만 바뀌는 세상이란 또 무엇일까. 나는 어떤 곳에 살고 있나. 언제부터 한국에 죽음을 시정의 수단으로 쓰는 못된 습관이 자리 잡은 걸까.
하나의 죽음이 전파를 탄다. 우리는 오늘도 당신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논하느라 정신이 없다. 사람들의 입에, 손에 오르내리는 죽음은 어디까지 명예로울 수 있을까. 무덤 앞엔 화환들이 쌓인다. 나는 드높은 재단으로 옮겨지는 당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공공재를 떠올린다. 이리 저리 닳고 닳아 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기 십상인, 나라에서 맘 먹고 관리해야하는 재산. 이 사회는 아무래도 개인의 죽음을 공공재 삼기로 했나 보다.
세상이 바뀌려고 당신을 잡아먹었나. 그런데도 가시지 않는 허기에 눈이 멀어 또 누구를 잡아먹으려고 눈을 번뜩이나. 왜 그런 것들에도 할당량이 존재해 이렇게 여럿을 울리는 걸까.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인 죽음은 없다. 어쩔 수 없었다는 어설픈 핑계가 도무지 들어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부분이 누구의 방관, 누구의 경시, 또 누구의 태만으로 생겨난 인재(人災)다. 예고 없이 오는 죽음이 어디 있다고. 실은 한 사람이 죽기까지의 모든 걸음 걸음이 복선이다.
이미 골백번은 더 해체된 공동체라지만 그럼에도 지켜야 할 암묵적인 한계선은 있는 법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창고에 쌓인 지폐가 아니다. 그 한계선이 지켜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개인의 죽음이 암시하는 마지노선의 붕괴에 공포를 느낀다. 슬픔보다 먼저 오는 근원적인 공포다. 한국은 그 공포를 피해 망각을 택했다. 잊혀진 죽음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식으로 어제는 당신이 죽었고 오늘은 또 다른 당신이 죽었다. 어쩌면 내일은 나의 차례일지도 모르겠다.
너의 죽음으로 내가 사는 세상이 나아졌다고 말 해도 되나. 네가 '사는' 세상이 그럴 수는 없었나. 정말 네가 계속 살아 있을 수는 없었나. 죽어서라도 바뀌었으니 당신, 그곳에서 지금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