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산다는 건 길가에 만연한 잡초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
'서초구 뷰 좋은 오피스에서 코드를 짜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온몸에 흙먼지를 묻힌 채, 캐나다 어느 시골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비료에 물을 주고 있네. 참 알 수 없는 인생이야.'
그야말로 이 극적인 대비에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 할 작업은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밭에 쓸 비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비옥한 흙과 음식물 그리고 바싹 마른 건초, 낙엽 그리고 다시 흙을 층층이 쌓아 올린 후 오랫동안 숙성시키면 음식물은 자연스레 분해되어 거름이 된다.
조: 다니가 지금 만드는 비료가 1년 뒤에 나올 작물들에 쓰일 거야. 그러니까 오늘 대단한 일을 한 거지.
다니: 아! 저는 그냥 지금 비료 만드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멀리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네요!
조: 여기 있으니까 도시에 있을 때랑은 또 다르게 새롭게 깨닫는 게 참 많지 않니?
앞에 놓인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서 한 치 앞만 바라보며 매일을 살아가는 게 익숙했는데, 여기서의 시간은 몇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만 같다.
트리시: 이 잡초는 말꼬리같이 생겨서 홀스테일(horsetail)이라 하는데, 없앤다고 뿌리까지 뽑아버리면 안 된대. 하나를 뽑으면 열개가 더 생겨버리거든. 그러니까 그냥 밑동만 잘라야 해.
알리사: 요즘에 나무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나무 종류에 따라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다르대.
이름 모르던 잡초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왔던 나무들도 각각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이 친구들의 입에서, 나는 해볼 생각조차 못했던 말들을 계속 듣고 있자니 태어나 한 번도 안 써본 근육들이 마구 자극되는 것만 같다.
사라: 우와, 이 베리들 좀 봐! 진짜 통통하니 맛있게 잘 익었다. 너무 귀엽지 않아?
다니: 으응.. 그러게, 귀엽네!
시골 비포장도로 한쪽에 주욱 길게 뻗어있는 블랙베리 나무를 보고 흥분하는 사라가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베리를 보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정말 자연을 사랑하는구나.'
사라는 나무에 다닥다닥 달린 베리를 찬찬히 살피다가 몇 개를 살살 눌러보기도 하면서 제일 좋은 열매 몇 개를 골라 자기 입에 쏙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 손에도 한 개씩 쥐어준다.
사라: 먹어봐, 먹어봐! 완전 달지? 와, 진짜 최고야!
행복한 사라의 목소리가 가볍게 붕붕 뜬다. 길 가의 베리들을 보며 소녀처럼 웃는 사라가 왠지 시큰둥한 나와 대비되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도 소소한 것 하나에 저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매일매일 행복할 것 같기도 해.'
사라: 다니, 체스 둘 줄 알아?
다니: 아니, 시도는 해봤는데 좀 복잡해서 그만뒀어. 근데 그 질문받을 때마다 못 한다고 대답하는 거 별로인 것 같아. 한 번만 배우고 나면 이제 둘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이따 알려주라!
사라: 알았어, 그럼 이따 밥 먹고 나무집에서 보자!
한글로도 알아듣기 복잡했는데 영어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됐던 나는 밥을 먹고 네이버 블로그에서 체스 규칙을 하나하나 읽은 후 서걱서걱 낙엽을 밟으며 나무집으로 걸어갔다.
다니: 사라, 나 사실 만나기 전에 인터넷에서 공부를 좀 해왔어.
사라: 와하하하! 너 완전 염소자리*처럼 행동한 거 알아? 진짜 웃기다. 잘했어, 그럼 이제 내가 두는 거 잘 봐.
*염소자리는 서양권에서 뭐든 '열심히'하는 별자리로 알려져 있다. 내 생일도 실제로 염소자리에 속했다.
사라는 뜨거운 티를 홀짝이며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30분도 안되어 감을 잡은 내가 말했다.
다니: 나 이제 체스 둘 줄 알아!
표지판 아래 손을 들고 서있으면 지나가던 차가 당신을 태워다 주는 이곳, 펜더 아일랜드.
[ 정류장 ]
운전자는 여기 기다리는 사람을 꼭 태울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탑승자는 본인 책임 하에 호의를 누리세요. 물론 탑승은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