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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Apr 19. 2023

스물아홉, 트랙을 이탈해도 될까요?

도전하기에도, 안주하기에도 애매한 나이

워홀이요? 오렌지나 따다 올 수도 있어요


"저 퇴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12년 전 10월의 어느 날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저 자퇴할게요."

뒤늦게 소식을 들으신 고1 담임선생님께서 놀라 헐레벌떡 올라오시던 모습, 서로에게 상처뿐이던 엉망 같은 설전 끝에 밀어붙인 자퇴, 그 이후 한동안 엄마와 말 한마디 섞지 않던 시간들.

꼼짝없이 정해진대로 살아가는 게 미치도록 견디기 힘들어 자퇴했는데 그래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는 모르던, 누구의 응원도 받지 못한 채 올곧게 그려진 트랙에서 끝내 이탈해 버린 그렇게 덩그러니 외로운 열여덟의 내 모습 정도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12년 전 자퇴를 말하던 나도, 퇴사를 말하고 있는 지금의 나도 퇴로 따위는 생각해놓지 않은 듯 확신에 차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어릴 때완 달리 지금의 나는 뭐가 문제인지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가끔은 나를 믿어주던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인생이 크게 잘못되진 않더란 것 역시 지난날들을 통해 알고 있다.


"대표님, 저 진짜 연말 이후로 마음 잡고 좀 더 해보려고 했는데요, 결국 오래가질 못했어요. 왜일까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저번에 퇴사를 말씀드렸을 때 대표님께서 보여주셨던 비전과 목표는 제가 세운 목표가 아니고 제가 꿈꾸는 비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둘 다 제 것이 아닌 게 문제였어요."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거라고, 그러기엔 이제 어른이지 않냐며 쓴소리를 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말들이 어릴 때처럼 마냥 무시되기엔 아주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하고 싶지 않더라도 때론 '그냥' 인내하며 할 줄 아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했다.


"제가 주말 동안 알아낸 게 있는데요,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던 게 뭐 엄청난 포부와 계획을 가지고 용기를 냈던 게 아니라, 당시에는 단지 힘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런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 와서 사람들에게 멋있다고 평가받는 건지 궁금했어요. 실제로 그때엔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 알겠어요. 제가 자퇴를 했고 안 했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퇴를 하고 이어진 3년의 갭이어 끝에 어찌 됐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고, 또 그다음은 미국에서 인턴십도 해봤고, 그렇게 크고 작은 성취를 이뤄내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라는 걸요. 만약 자퇴 후에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여태껏 알바를 전전하며 살고 있었다면 그건 용기 있는 선택이 아니라 단지 치기 어린 비행으로 남았겠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제가 여기서 얼마나 더 일을 할 건지, 그래서 기껏 따놓은 캐나다 워홀비자는 언제 어떻게 할 건지, 대체 어떤 게 최선의 선택인지, 더 이상 저울질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그냥 이제... 제가 지금 하고 싶은 걸, 지금 할래요."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나중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될 테니까, 그렇다면 더욱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경험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로 그 순간순간을 채워나가야지, 내 인생 도서관에 다양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채워 넣어야지.


그게 내가 내린 다소 청개구리 같은 결론이자, 내 인생 다음 챕터의 서막이 되었다.




내가 살던 자취방은 오피스텔 꼭대기층이어서 저녁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돌리면 강남대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양 도로 끝과 끝까지 주욱 길게 늘어져 너무나도 예쁜 도시야경이 펼쳐졌다. 강남 한복판에, 그것도 강남대로가 훤히 보이는 이 꼭대기층에 내 자취방이 있다니! 첫 몇 달은 그 기분에 취하는 게 좋아 밤마다 자꾸만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퇴사하기 몇 달 전, 나는 같은 야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워홀을 가게 된다면 이 밤풍경이 예쁜 오피스텔도, 번화가의 편한 인프라도, 먹고사는 데 있어 어느 정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이 안정적인 삶도 모두 포기해야 해.

깔끔한 집은 고사하고 한동안 직업이 없을 수도 있고 그래서 먹는 것 하나 입는 것 하나 편하게 살 수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날들을 얼마간 보내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아니, 애초에 이런 것들이 내 것이 맞을까? 정말 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일구어내어 쥔 게 맞는지 의문을 갖고 있던 건 나였잖아.'


결국 내 알량한 실력이 볼품없이 드러나고 이마저도 일순간 사라져 버릴까 봐 벌벌 떨었으면서, 내가 잘해온 게 아니라 운이 좋은 몇 년이 계속 이어졌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항상 겁먹고 있던 나였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던 덕에 근 몇 년은 그들의 응원이나 지지에 기대어 잘하고 있다고,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애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연명해 왔을 뿐, 그 믿음이 온전히 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똑바로 마주해보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본다면 거기서 내가 성취한 것들은 좀 더 믿을 수 있을까,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래, 이렇게 아슬아슬 외줄 타는 듯한 마음으로 살아갈 바에 그냥 해보자!

두려우니까 더 도전해 봐야겠다. 도전해서 확인해 봐야겠다.


스물아홉, 정해놓은 것 하나 없이 나는 그렇게 세 번째 회사를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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