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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란 Feb 25. 2022

폴란드 결혼식 하기 : 3. 보드카 시음회

와인 시음은 해봤는데요, 보드카 시음은 처음입니다.

폴란드인은 술을 좋아한다. 아니 술을 안 좋아하는 민족이 있던가? 싶지만 이들의 술 사랑은 한국인의 영혼의 쌍둥이인가? 싶을 정도이다. 


한국인이 소주를 보며 '한국적인' 감정을 느끼듯, 폴란드인에게는 보드카가 그렇다.  보통 보드카(wódka)라는 술에서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많은데, 폴란드인들은 보드카가 폴란드 술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보다 앞선 15세기에 보드카 양조를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보드카라는 이름의 기원은 폴란드어 혹은 대다수의 슬라브어에서 물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보다(폴 : woda, 러 : вода)에서 왔다. 어미 ~ka는 어떤 명사의 애칭을 뜻하니, 작고 귀여운 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물처럼 친숙한 보드카와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간은 소주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의 간에 비해 강한 편이다. 회사에서 한국인과 폴란드인이 섞여 회식을 하면 항상 진풍경이 벌어지는데, 보드카에 익숙해진 폴란드인들이 안주 없이 소주를 음료수처럼 덥석덥석 마시고 (참고로 이 민족도 남 잔이 비는 걸 못 보는 병이 있다.) 그 템포를 따라가던 한국인들이 컨디션 조절을 못해 금방 드러누워 버리곤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보드카를 매일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 민족인가? 그렇지는 않다. 철없는 어린 시절에야 (우리가 대학 새내기 시절 한 번씩 흑역사를 만들었듯이) 술 먹고 소리도 지르고, 남의 집 계단에도 누워보고, 다리 밑을 침대 삼는 일이 없진 않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지금 보면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절제하며 마시는 편이다. 성인이 술 취해서 밖에서 잠이 들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무척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고 밖에서는 적당히 조절하고 자리를 뜨는 편이다.


하지만 이 인간들의 이성의 고삐가 풀리는 날이 있으니, 그건 바로 결혼식이다. 잔치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예 밤새도록 먹고 자고 가라고 판을 깔아줘서 그런가? 일반적인 술자리에 비해 술 소비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결혼식에 폴란드인들은 엄청난 양의 주류를 소비한다. 폴란드 웨딩 관련 포탈에서 어렵지 않게 "결혼식용 주류 계산기"이라는 재미난 것을 찾을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대충 평균적인 피로연 인원인 100명 집어넣어 보았다.

이 계산기에 따르면 필요한 양은 (선물용을 제외하더래도) 성인 하객 1명당 보드카 반 리터짜리 한 병이다. 양으로 보면 적어 보이지만 40도짜리 술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거기에 각종 샴페인, 맥주, 와인 등 다른 주류를 더 주문한다. 하지만 폴란드 결혼식을 상징하는 술은 보드 카기에, 이것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 병의 디자인이나 색깔을 피로연 장식과 어울리게 배치하는 경우도 있고, 병목에 장식 줄을 걸거나 커버를 씌우는 경우도 있다.




"좋은 파티를 만드는 건 술이야!"


우리 (예비) 시부모님의 지론이셨다. 술이 맛없으면 파티는 재미가 없다나. (예비) 시어머니는 다른 것은 참견하지 않겠지만 결혼식에 꼭 칵테일바가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피력하셨다. 보드카도 좋지만 바텐더가 즉석에서 말아주는 칵테일이 여성 하객들에게는 더 좋다나. 나도 칵테일바가 있는 결혼식을 갔었고, 밤새도록 무제한 칵테일 제공을 실컷 즐겼기 때문에, 나도 꼭 하고 싶었다. 


단 견적을 받고 포기했다. 견적은 하룻밤에 8천 즈워티(약 250만 원),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예산을 초과할 것 같고, 바텐더를 고용한다 해도 결혼식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보드카는 우리가 사야 하고 칵테일에 들어가는 주류는 우리가 별도로 제공해야 하는데 이 비용도 부담이 되었다. 더군다나 21년 폴란드의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인해 22년도 술값이 치솟는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던 차였다. 


(예비) 시부모님도 우리의 결정을 이해해 주셨고, 대신 위스키와 럼, 기타 양주를 따로 사서 원하는 하객이 따라먹을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회사 동료를 통해 좋은 바텐더를 소개받아서 저 가격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바텐더를 계약했다 ^^; 역시 인맥이 최고다.)


"보드카 시음회를 하자!"


예비 시아버지의 제안이었다. 결혼식에 놓을 보드카에 대해 어머니, 아버지, 나, 남자 친구 모두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공평하게 한 자리에서 마셔보고 투표로 결정하자는 것인데, 우리 모두 동의했다. 


어느 토요일 저녁, 나와 남자 친구는 각자 좋아하는 보드카 두 병을 싸들고 남자 친구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자, 이제 어떤 보드카가 맛있는지 겨뤄 볼까요?




후보 보드카 6종 중 예선을 통과한 4병과 고양이 심판님


후보는 총 6병이었고, 다 같이 한 종의 보드카를 열어서 한 잔씩 마시기를 반복한 이후 개중 승자를 가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게 맛있는 거 같은데?"

"아냐, 이게 목 넘김이 더 좋아!"


나하고 남자 친구의 입맛은 무척이나 달랐고 이에 예선을 거쳐 다시 4종의 보드카로 2차 본선을 했다. 

왠지 좀 마시다 보니 그게 그거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시음인 만큼 최선을 다해 맛을 음미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보드카 듀스 101을 통해 선택받은 보드카는 무엇이냐면, 

챠르니 보 치안(Czarny Bocian, 검은 기러기) 보드카! 


내가 추천한 보드카가 우승을 하니 좀 감개무량했다. 네, 제가 먹는 것에는 선견지명이 있어요. 

목 넘김이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단맛이 올라오는 게 보드카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두 잔 정도는 먹어볼 만한 보드카다.


사실 병 모양이 예뻐서 고른 건데 맛도 훌륭했다. 역시 이쁜 게 최고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시간은 아주 재밌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단지 술을 고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예비) 시부모님과 결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음식 일주일 후... 보드카가 도착했다.




아니, 하객 1명당 1병 아녔나요? 이거 왜 이렇게 많은 거죠? 100병이 아니라 200병 사신 것 같은데?

이렇게 구입된 보드카는 여름 결혼식을 위해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하객 여러분이 저걸 다 마실 수 있으셔야 할 텐데...


이렇게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인 술이 결혼식 6달 전에(...) 구입 완료되었다. 

다음 미션은 무엇일까?


"아이고, 너무 늦은 거 아냐? 초대장을 보내야지!" 

"하지만 결혼식은 반년이나 남았는데?"

"반년밖에 안 남은 거지. 하객 명단부터 만들자!"


이제는 남자 친구가 내게 숙제를 던져주었다. 

누굴 초대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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