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국민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신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권과 검찰을 비롯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책임론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검찰청을 출입하는 유력 언론사의 일부 기자들은 검찰의 일방적인 수사 브리핑 내용을 받아쓰기 하던 무분별하게 보도한 기자와 언론사의 문제점을 스스로 질타하는 자성 어린 고백을 쏟아냈다. 언론 스스로 노 전 대통령 죽이기에 일조했음을 인정한 대목이다. 80년대 인권변호사 시절 이후 88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사실 부당한 수구언론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다. 왜 그는 언론과 타협하지 않은 길을 걸었던 걸까? 노무현과 수구언론과의 악연을 초기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로 자신을 향한 검찰의 수사가 옥죄여오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4월 12일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해명과 방어가 필요할 것 같다”는 글을 올려 언론보도의 문제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언론들이 근거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 놓아서 사건의 본질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재는 주로 검찰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이미 기정사실로 보도가 되고 있으니 해명과 방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노무현은 4월 30일 검찰 소환과 언론의 계속되는 압박에 마지막 선택을 했다. 일부 언론은 노무현다운 ‘마지막 승부수’라고 했다. 과연 그러할까? ‘원칙과 상식, 신뢰를 지키기 위한’ 노무현의 마지막 결단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 마을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서거한 다음날,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최상재)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이명박 정권과 검찰 조중동이 공모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언론노조는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명박 정권과 검찰, 조중동이 공모한 ‘정치적 타살’이라고 규정한다”며 “이들 세 집단은 조문이 아닌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노조는 “2008년 2월 퇴임 이후 고인은 소박한 인생 구상을 허락받지 못했다. 부자출신 이명박 대통령과 그 하수인들이 점령군으로 행세하며 거의 모든 직종과 부처에서 참여정부의 그림자를 강제로 벗겨냈다”며 “검찰과 조중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른바 친노 인물 색출과 숙청, 도덕적 흠집내기에 혈안이었다”고 지적했다.
언론노조는 “조중동은 참여정부 이후 급속히 번진 수구족벌 언론 비판에 놀라 참여정부 정책을 이유없이 폄하하고 매질했다”며 “고인의 죽음은 탄압에 모질지 못한 인간의 자살이 아닌 현 정권과 검찰, 조중동이 공모하고 강요한 정치적 타살”이라고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책임을 질 것을 촉구했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언론이 직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수구언론과의 불화는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87년 6․10국민항쟁과 기만적인 6․29선언,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염원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88년은 민주노조 설립운동이 거세게 전국에 몰아쳤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도 극심했다. 노무현과 언론의 첫 번째 싸움의 발단은 울산 현대중공업이었다. 88년 12월 노무현의 울산 현대중공업 노조원 대상 강연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연합뉴스>의 왜곡보도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가 계속 인용하면서 노무현에 관한 그릇된 시각을 심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당시 강연에서 ‘나 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 국회도 흔들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 어디에서 출마해도 당선된다’라고 연설했다며 보도됐기 때문이다.
보도가 나가자 경총, 현대중공업 등에서 ‘경영계에 커다란 충격을 준 행동’, ‘노사분규를 악화시키는 무책임한 선동, 인기발언’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보도를 본 시민들도 큰 실망을 하였다.
<조선일보>는 당시 ‘만물상’을 통해 ‘“나 같은 사람은 20명만 있으면 국회도 흔들 수 있다”하는 발언은 여간 오만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여타의 국회의원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며 맹비난을 가했다.
이에 대해 92년에 발간된 『노무현論』의 저자 김용철은 저서에서 “이 보도는 엄청난 왜곡이었다”, “특히 『조선일보』사의 경우는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하였다”라며 연합통신 울산주재 기자가 왜곡보도를 한 것을 <조선일보> 등이 확대 보도해 비화된 것이라고 짚었다.
당시 노무현은 “나는 왜곡기사를 작성한 언론사와 이에 한 몫을 한 노동부에 대해 법적 조치는 물론 모든 수단을 통해 진실을 밝힐 것이며, 연합통신에서 작성된 경위와 그 내용의 사실 여부의 확인도 없이 각 신문에 보도된 경위, 현대 측이 이에 대해 관여했는지의 여부가 밝혀져야 한다. 당시 현장에서 기자들이 취재한 적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노 의원이 항의성 해명을 하자, 울산 주재 기자들이 항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맞대응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중공업노조는 “우리는 현재 재벌이 관제언론을 매수하여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노의원의 강연내용을 왜곡하여 거짓 보도를 하고 있는 모든 언론 매체는 왜곡보도를 중즉각 중단하라”며 노무현을 옹호했다.
언론의 악의적 보도를 근거로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은 노무현을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발언 내용은 달랐다. 노무현과 보좌진들이 직접 연설 테이프를 몇 번씩이 확인했는데 “노동자 대표 20명만 국회에 보내 주면 화끈하게 한번 하겠는데”, “(여기 울산 동구에서) 노동자 대표 한번 뽑아주이소. 저는 딴 데 어디 가면 또 안 되겠습니까?”였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라며 노무현은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지은이 약력에 이렇게 표현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소위 ‘청문회 스타’로 각광받는다. 12월 현대 중공업 강연 사건으로 언론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 아들 건호 씨는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중 <아들이 본 노무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의 발언의 내용이 어떠했고, 왜 그렇게 악의적으로 신문 기사가 났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제는 우리집에 욕설 전화가 엄청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기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16살이었고, 한참 예민할 때다 보니 그런 전화를 견디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생략) 이 일이 있은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전화 받는 걸 기피하게 되었고, 그런 기피증은 지금도 여전해서, 전화가 오면 서로 안 받으려고 한참 눈치를 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겹치자 신문과 방송에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언론과의 불화 사건 역시 <조선일보>였다. 92년 총선을 앞두고 <조선일보>는 91년 9월 17일자 인물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김용철『노무현論』참고)
“과거 5공 청문회 당시 돋보이는 활동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던 고졸의 변호사 출신. 초선이지만 야당통합 때의 기여도와 언변 등이 참작되어 본인의 고사자세와는 상관없이 대변인에 발탁. 원내 진출 이후 노사분규 현장을 자주 찾아다니는 등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벌이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도. 한 때 부산 요트 클럽 회장으로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김용철은 『노무현論』에서 “『조선일보』의 이러한 인물평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일보』이상으로 일관된 보수성을 가지고 있는 『동아일보』의 노의원에 대한 인물평과도 대비되고, 『조선일보』의 통상의 정치인에 대한 인물평과도 다르다.”라도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0월 6일자 <주간조선>은 ‘노무현 의원은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노무현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김용철은 “(주간조선의) 그 다음의 내용은 모두가 인신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다”라며 “이쯤되면 이것이 삼류 오락지의 기사인지, 한국 굴지의 언론사의 기사인지 구별하기 힘들어 진다.”라고 기사의 문제점을 비꼬았다.
노무현은 <주간조선>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사실상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질긴 악연의 시작, 기나긴 전쟁의 포문이었다.
노무현은 저서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막상 조선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말리고 나섰다.” “정치인이 신문사와 싸워 뭐 좋을 게 있냐… 옳지만 손해보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기사 전체가 사실무근이며 나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노무현의 <주간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에 대해서 그 스스로 말했지만 어느 신문을 뒤져봐도 승리를 전해 주는 기사가 없었다. 그는 “언론인들의 뿌리깊은 ‘동족 의식’에 혀를 내두르면서 다시 한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노무현은 이후 조선일보 사장과 기사를 쓴 기자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소송을 취하했다.
노무현은 2001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부당한 왜곡보도를 자행하는 조선일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집권과 퇴임, 서거 전까지 지켰다. 또한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디지털 말』기자로 있던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검증이 된 인터넷언론에게 청와대 기자실을 개방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약속대로 2003년 6월 청와대 기자실을 인터넷언론에 활짝 열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기자실의 폐해가 다시 살아나자,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이라는 기자실 개혁조치를 강행했다. 진보언론까지 가세해 노 대통령을 공격했다.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은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으로 백지화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청와대의 인터넷매체에 대한 극심한 차별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조중동 등 주류 언론에 비해 청와대를 출입하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인터넷매체들은 차별대우를 극심하게 받고 있다. 아예 대통령과의 인터뷰나 편집국장 오찬 등에서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7년 6월 17일 KBS를 통해 생중계됐던 「노무현 대통령 언론인과의 대화」이후 본 기자를 포함한 언론단체장들과 노 대통령 간의 비공개 Tea-Time이 10여 분간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사실 기자실의 폐해를 개혁하자고 하니까 참모들이 다 말렸다”라며 “그러나 이대로 기자실의 폐해를 둔다면 다음 정부에 그 후과가 다 돌아갈 것 같아서 '대통령 목 떼 놓고 하라'는 것이라고 참모들에게 몰아붙여서 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지시'라고 보도하는데, '대통령의 그냥 지시'가 아니라 ‘강력한 지시’이다”라며 “나는 기자실 개혁을 해서 (다음 정부에) 넘겨줘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수구언론과의 전쟁은 그에겐 운명이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조선일보>와 싸우는 이유에 대해서,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편에서 유시민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유시민 : 조선일보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노무현 : 첫째 너무 세다. … (둘째) 우리 한국 국민들에게 너무 수치스럽다. 수치감을 줍니다. 해방된 지 언젠데 친일언론이, 독재 아부한 언론이 계속해서 일등을 해야 되냐. 좀 국민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 아니냐. … 세 번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낸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은 2002년 대선 경선에서 노무현을 악랄하게 공격했다. <동아일보>는 노 후보의 장인이자 권양숙 여사의 부친의 좌익경력까지 거론하면서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노 후보는 “그럼 나더러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라며 조선, 동아일보를 향해 대선 경선 개입에서 손을 뗄 것을 촉구했다. 수구언론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를 흔들었다. 결국 권력은 다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노무현 : 예, 그 때(87년 9월) 대우조선에 갔다가 구속이 됐는데 어머니가 아주 낙담하셨죠. 우리 어머니는 딱 한 가집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거꾸로 강하게 박혀 있어요. 그리고 5공 때 학생들 변론할 때, 학생들 어머니들이 꼭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변호사 사무실에 오셔서 꼭 그 얘기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하더라고…….(『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중 <인터뷰․인간 노무현, 흔들리지 않는 게임의 법칙> p33(유시민 (시사평론가))
<조선일보>를 비롯 수구언론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연 ‘모난 돌’이었을까? 아니다. ‘모난 돌’은 조중동이었고, 그는 그들을 바로 잡기 위한 ‘정’이었다.
"나를 보고 ‘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3당합당 당시 이를 반대했던 일이다. 최근에는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당시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튄다’는 것은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생략) 조선일보 등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 땅에 다시는 권언유착의 잘못된 관행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생략) 내가 왜 일부러 나서서 세무조사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언론개혁을 주장했을까? 다시는 언론에 의해 정치인의 생명이 좌우되고 정권의 향방이 바뀌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중 <노무현 자전기록> p136~137
정치인 입문 이후 살아생전 노무현은 왜 그토록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불의한 언론에 굴하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거한 뒤에도 조중동뿐만 아니라 <연합뉴스>까지 가세해 ‘사자(死者) 죽이기’가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 가슴을 때린다.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후보 유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