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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lalee Dec 20. 2021

한 조각의 시간

쪼개고 쪼개고




늦은 밤 여자아이는 책상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크고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원을 자를 대고 그어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계획표를 만든다.  잘못 그어진 선을 지우개로 열심히 지우고 다시 긋고 또 지우고를 반복하면 아주 완벽해 보이는 방학 계획표가 완성된다.

 나는 이 계획표 만들기를 참 좋아했다. 친구들과 놀기, 티브이 보기, 꿈나라 여행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고 공부하기 , 복습하기 , 책 보기는 아주 좁은 칸에 나누어 넣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만든 방학 계획표는 지키지 못할 계획들로 가득했지만 계획표를 만들며 상상하는 내일이 참 좋았던 것 같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때처럼 크고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원을 쪼개고 쪼개 하루의 시간을 만든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가끔 초단위의 계획이 필요하기도 하다. 전쟁 같은 아침 등원 시간이 지나면 곧 하원 시간이 되고 하원을 하면 놀이터에서 기본 한 시간은 같이 놀아줘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발레학원과 미술학원 라이딩도 해야 한다. 이 스케줄 사이사이에 어린이집 엄마들과 커피타임도 가져야 하고 밀린 집안일에 그림 외주 일도 해야 한다. 1분 1초가 아까운 그 시간 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느끼고 싶고 일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에 더 자를 것도 없는 그 시간을 또 나누고 있다. 크고 둥근 그 원이 더 컸으면 좋겠다. 더 많은 시간을 쪼개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커질수록 내 생활은 더 바빠지고 잠은 줄어들고 바쁨 속에서 놓치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체력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하루에 커피를 3잔 이상 마셔도 잠이 쏟아졌고 쉬어도 쉬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니 피곤은 더해만 갔다. 입 안에 구내염이 생기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파왔다. 각 종 비타민과 프로폴리스를 입 안에 때려 넣고 나서야 안심을 하며 또 시간을 쪼개는 매일매일을 반복하면서 살았다.  나는 그렇게 체력을 놓쳐왔고 남아있는 체력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사들인 각종 약들로 인해 통장 잔고를 놓치게 되었다. 그러나 초단위로 쪼개는 이 습관 때문에 놓친 것들 중 제일 큰 것은 '아이의 성장'일 것이다.

아이와 늘 몸은 함께했지만 머릿속은 그다음 일정과 계획들로 가득했다.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그 순간순간에 아이는 빠르게 커버렸다. 아이의 성장을 놓쳤구나 느낀 건 딸보다 2살 어린 친구네 아이를 보면서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면서 내 딸의 어릴 적을 떠올려 보았다. 언제 처음으로 '엄마'를 불렀는지, 언제 걷게 되었는지, 언제 가장 즐겁게 까르르 웃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들을 아기와 온전히 함께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이 밀려왔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시간을 쪼개 왔던 것일까?


나는 그 이후로 다양한 시간을 그린다. 모닝빵처럼 작고 동그란 시간, 생크림 케이크처럼 크고 폭신한 시간, 바게트 빵처럼 긴 시간을 그리고 딱 한 조각만 떼어낸다. 그 한 조각의 시간만큼은 내 시간으로 남기고 나머지 시간들은 물 흐르듯 쪼개지 않고 놔두었다. 아이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고 내 일을 하는 바쁜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매일 남겨두는 그 한 조각의 시간 덕분에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그림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떼어낸 그 한 조각의 시간이 점점 커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그 시간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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