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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lalee Dec 20. 2021

한 조각의 시간

나는 다시 꿈을 꾼다

2.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새하얀 벽에 유니크한 조명이 달려있고 오크색의 커다란 책상과 심플한 의자가 놓여있는 아담하지만 작지 않은 방이 있다. 그 방의 창문은 크고 높으며 유럽의 창문처럼 빈티지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창 밖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바람에 넘실대고 새들은 여유롭게 지저귀며 날아다닌다. 타닥타닥 초가 타는 소리와 슥슥 붓질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그 공간에서 밤을 새우며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 내가 꿈꾸는 작업실의 모습은 바로 이렇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꿈꿔온 ‘작업실 구하기’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 현실적인 문제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월세이다. 집 근처 상가들의 월세를 알아볼 때마다 ‘창조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떠오른다. 괜찮은(가격이 낮은) 물건이 보이면 반지하 이거나 30년은 돼 보이는 건물에 아주 작은 평형이다. 어떤 곳은 건물 복도에 가벽을 쳐서 임시로 만든 공간을 월세 50만 원에 내놓았다. 창문도 없는 이 공간은 보고만 있어도 답답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월세를 낮춰 집에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새로 지은 건물들을 알아보았는데 딸이 내년에 다닐 유치원과 거리가 꽤 있어서 차로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3시간 이상 머물기가 힘들 것 같아 포기해야 했다.  

어느 상가는 화장실이 너무 멀고 또 다른 상가는 북향이라( 해가 촤르르 들어오는 작업실을 꿈꾸기 때문에) 포기했다.

 

남편은 방 하나를 작업방으로 쓰고 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구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맞다. 나는 지금 방이 3개 있는 34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안방, 아이방, 작업방으로 나눠 사용 중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짐이 많아지는데 공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 많은 아이의 물건들이 내 작업방에 쌓이고 내 물건들과 섞여 이 방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작업실을 구하면 고생만 할 거라고 입이 닳도록 연설을 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결혼 전 그 멋졌던 오빠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싶다. 결혼 전에 남편은 아주 근사한 작업실을 마련해 준다고 꼬셔 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한다. 여자를 꼬시려고 막 던진 말을 내가 덥석 물어버린 것 같지만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한참 작업실을 알아보았지만 나에게 딱 맞는 작업실을 찾지 못한 나는 아파트 작업방을 내 맘에 쏙 드는 작업실로 만들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먼저 스크랩 해 둔 외국의 인테리어 사진들을 모두 모아 아이템들을 분석했다.

분석한 결과, 분위기를 좌우하는 예쁜 조명과 하얀 벽 그리고 넓은 책상과 작은 소품들, 체크무늬 커튼과 의자 그리고 삭막한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식물이 필수 아이템이었다. 나는 즉시 쇼핑앱을 켜고 장바구니에 아이템들을 마구마구 넣었다. 그 많은 소품들을 결제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10분 남짓이었다. 하나 둘 택배들이 도착을 하고 본격적으로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먼저 아이 물건들을 다 정리하고 묵혀둔 내 물건들도 하나씩 털어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오크색 선반과 석고상 그리고 마티스의 그림이 그려진 액자들과 이케아 조명이 자리를 잡았다. 휑했던 창문에는 노란 체크무늬 커튼을 달아주었더니 따뜻함이 가득 채워졌다. 벽에 붙여서 사용하던 큰 책상은 방 가운데로 옮겨와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책상으로 만들었고 그에 따라 필요해진 의자를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몬스테라 대형 사이즈를 오크색 선반에 올려놓으니 제법 마음에 드는 작업방이 완성되었다.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뀐 작업방을 탐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남편과 딸이다. 이 둘은 각각 노트북과 동화책을 들고 씨익 웃으며 내 작업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아이는 동화책을 보고 신랑은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데 세 식구가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밤이 너무 따뜻했다.


사랑이 싹트는 따뜻한 세 식구의 밤이 몇 번 지나고 나니 내 작업방에는 아이의 물건뿐만 아니라 남편의 물건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이의 동화책, 가위, 점토, 먹다 남은 우유 그리고 남편의 노트북과 모니터 그리고 각종 충전기기들과 먹다 남은 커피까지.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한테 딱 맞는 작업실을 꼭 찾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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