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은나 Oct 28. 2020

즐거웠어요, 3주간의 마감이 있는 삶.

글쓰기 모임을 통해 내 삶에 들어온 마감 시간과 글쓰기 동료들




이후북스의 하루 열 문장 쓰기 모임이 끝났다. 3주 동안 매일 하현 작가님에게 글감을 받고, 그 날 자정까지 글을 올리며 지냈다. 마감 시간이 미국 시간으로는 오전 11시이기 때문에 자기 전에는 다음 날 일어나서 글을 쓸 생각을 하며 잠들었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자마자 바로 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서둘러 글을 써서 올렸다. 내 삶에 마감 시간과, 내 글의 독자가 되어주는 글쓰기 동료들이 생긴 것이다.


바쁜 삶 속에서 글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임시 공동체를 이루고 매일 마감시간을 지켜 글을 쓰는 연습을 하니, 나도 '글을 쓰는 사람'에 조금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마음 한편에 글감을 품고 있으니 평범한 일상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리고 3주 동안 나의 독자가 되어주며 내 글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어떤 글이 가장 와 닿았는지 피드백을 준 글쓰기 동기들 덕분에 내 글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우연히 포착한 일상의 순간을 묘사하는 사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감정을 눈에 보이듯 표현하는 사람, 공기 반 소리 반의 느낌으로 글을 쓰는 사람 등등,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며 많이 배우기도 했다. 한 가지의 글감을 가지고 저마다 이렇게 다른 글을 써낸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래서 내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글을 쓸 때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도 더 명확해졌다. 잘 쓰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를 드러내는 것. 공들여서 쓰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힘을 덜 들이고 쓴다는 생각으로, 잘 쓰고 싶은 마음을 조금 내려놔야겠다.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글을 쓰기 위해서. 그리고 더 솔직하게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윤정언니가 얘기해준 것처럼, 나를 더 드러낼수록 읽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을 이번 모임을 통해 많이 느꼈다.


쓰고 읽으며 즐거웠던 만큼 3주가 빨리 지나가버린 것이 아쉬워 또 글쓰기 모임이나 다른 프로그램을 신청해볼 생각이다. 다만 글쓰기 모임에 몰입해있다 보니 본업에 조금 소홀했던 것 같아 당분간은 일에 잘 적응하는 것에 더 무게 중심을 옮겨가려 한다. 내 우선순위와 하루 일과를 재정비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글을 쓰는 사람의 시선을 잃지 않고 살아야겠다. 끝으로 3주 동안 쓴 열다섯 편의 글 중에서 나의 글쓰기 동료들이 제일 좋아해 준 글과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글을 차례로 붙여 본다.




<주제: 편지,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


안녕, 네가 우리 집의 밭이 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네. 엄마와 아빠는 상추와 고추 씨앗, 고구마, 옥수수 모종 등을 사다 심고 너를 가꾸면서 어렸을 적 밭을 돌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많이 생각이 났대.


처음에 너에게서 난 야채를 먹었을 때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식탁에 올라와 있는 싱싱한 야채를 보며 아빠와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 서울에서 큰 딸이 내려오는 날이면 조금이라도 건강한 음식을 차려주고 싶어 가장 예쁘고 벌레 하나 먹지 않은 상추와 고추만 하나하나 골라 땄을 그 마음을.


아빠가 비닐하우스 안에 넓은 마루를 만들고 바닥도 고르게 깔았대. 가족들이 모이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부모의 마음은 늘 기다리는 마음일까?

밭 한쪽에는 먹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수선화와 작약을 가득 심었대. 엄마가 보내준, 아빠가 심은 꽃들이 모여 길을 이룬 사진을 보면서, 자식들이 꽃길만 걷길 바라는 아빠의 묵묵한 마음 같아서 가슴이 많이 뭉클했어.


작년에 퇴직을 한 이후로 아빠는 거의 매일을 너에게 가서 농작물을 돌보고 비닐하우스를 손 본대. 혹시라도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아빠가 땀을 닦으며 “하이고, 잘 자랐네.”라는 말이라도 하면, 잘 들어줘. 우리 아빠는 아주 말수가 적은 사람이거든.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담아서 내년에도 무럭무럭 잘 자라줘. 가족들을 위해 많은 말들을 삼키며 살았던 아빠의 작은 꽃길이 되어줘.


2020.10.21




<주제: 나의 서랍>


본가에 갔다가 장롱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 쓰던 물건들을 모아놓은 상자를 발견했다.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조심스레 걷어내고 열어보니, 오래된 기억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교복에 달고 다니던 명찰, 모의고사 성적표,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 자율 학습 시간에 끄적거린 메모들, 매주 쓰던 방송 원고, 셋이서 틈틈이 주고받았던 교환 일기 노트.


하나씩 들춰 보며 웃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다가, 교환 일기장을 열어 한참을 읽는다.

우리는 스무 살이 되면 함께 티베트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었다. 큰 배낭을 메고 얼굴이 그을릴 때까지 돌아다니다 셋이서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잠들자고. 그러다 고원의 강렬한 아침 햇살에 저절로 눈이 떠지면, 시장에 가서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가장 쪼글쪼글하게 잡히는 노인에게서 과일을 사 먹자고.


그렇게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티베트를 그리워하며 고3의 막연함을 견디던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고,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는 스무 살의 시간에 조금씩 휩쓸려갔다.


그때 우리를 지탱해주었던 낭만을 뒤로하고 지금은 각자의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쩌다 티베트를 떠올리는 날 마음 뒤켠 어딘가에서 따뜻한 온기가 피어났으면 좋겠다. 고요하고 모든 것이 느린 히말라야의 마을을 마음껏 누비는 모습을 꿈꾸던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며, 한 뼘 정도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2020.10.08



ⓒ James Wheeler from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아이돌, 나의 언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