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원했던 저녁이 있는 삶인데
내가 원하던 일을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고 행복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3년 동안 입시와 학업에 파묻혀 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온 나는, 프로답게 일하고 사회에 세련되게 적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예민해져 있었다. 매달 갚아야 하는 학자금이 쌓여있어, 연봉은 올랐어도 생활은 더 빠듯했다. 친한 친구들은 이미 결혼과 육아로 관심사가 많이 달라져있었고, SNS에서 더 예쁜 사람, 더 능력 있고 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높아지고 예민해지다 보니 가족, 연애 등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도 전에 없이 어렵게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이 늘 무거웠다. 바쁘게 지내면 나아질까 싶어 쉬는 날도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봐도, 불안한 감정은 기어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원래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 건가,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나는 별일이 없으면 5시에 퇴근을 하고, 6시가 되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예전 직장에서 그토록 꿈꾸던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진 것이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해서 쉬다 보면, 텅 빈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고 침대에 누워 멍하게 핸드폰과 책을 번갈아 보다가 잠들곤 했다. 칼퇴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면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퇴근하는 길이 허무했다.
그러다 한 지인의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다. 퇴근을 하고 나서 집에서 혼자 책도 읽고 쉬기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 퇴근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쉬어도 괜찮은 거라고? 그냥 있어도 안 불안하다고? 대수롭지 않은 얘기였을지 모르지만 내겐 생소하게 다가왔다. 나에게는 퇴근 후 지친 몸을 다독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목표를 이루었는데 왜 불안했을까? 전속력으로 달려 목표 지점에 도착했는데, 그다음 이정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30년 가까이 살면서 나는 늘 어딘가로 향해가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목표였고, 대학교 때는 취업이라는 다음 단계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열심히 공부해서 통역사가 되었는데,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이게 전부인가? 그다음은 뭐지? 더 높은 목표? 결혼? 연봉 인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지 않고 멈춰 있는 삶,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삶이 낯설었던 것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갈 줄만 알았지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주위를 돌아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멀쩡하게 일하고, 말하고, 웃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불안함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나. 왜 항상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지. 인생 역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도 한꺼번에 빵빵 터졌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작은 점 같은 나날들일지 몰라도, 그 순간에는 혼자 견디기가 버거웠다.
자존심은 또 왜 그렇게 셌는지, 다른 사람들 의식하며 나도 재미있게 잘 사는 척했지만 돌아서면 허무했다. 나만 불안한건지, 아니면 다들 이렇게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힘겹게 버티고 있는 건지, 누군가가 좀 속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부의 것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