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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공비행 Aug 16. 2023

계획과 무계획의 무계획적 결합.



프로토콜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잔뜩 구겨진 이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고, 날씨도 그렇게 화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옷이라도 밝게 입어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하얀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상의의 경우에는, 초록색 반팔 셔츠를 꺼냈습니다. 적어도 지나가는 행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계절과 어울리는 밝은 색상일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게다가 오랜만에 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장소 또한 어두움으로 인기를 끄는 공간이란 점도 한몫하였습니다.


아, 날씨가 아직은 많이 덥긴 하였지만 초록의 체크무늬가 들어간 긴팔 셔츠를 위에 걸치기도 하였습니다. 에어컨 바람을 많이 맞다 보면, 한동안 잊고 지내던 두통이 다시 고개를 들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어쨌든, 나름대로의 밝은 차림을 갖춘 채, 밝은 표정을 억지로 지어보며 길을 나섰습니다. 주변 지인들이 보기에 저만의 스페셜이라 할 수 있는 검정 마샬 헤드폰도 당연히 제 머리에 올라앉아있었고요. 오늘의 첫 선곡은 Queen의 Under Pressure였습니다. 


좁디좁은 연희동 자취골목의 길들을 걸어 나가다 보니, 한쪽에 자리 잡은 독립 영화관인 라이카시네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라이카시네마,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영화관임에도 그 독특한 외관과 내부의 특성상 다양한 방문객들이 항상 자리하곤 하였는데요. 마침 오늘도 한껏 꾸민 채 연희동을 찾아온 외부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무릎을 구부리고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이 있었고, 그분의 친구로 보이는 한 사람은 카메라 렌즈가 가리키는 곳에 서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셨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오늘은 법정공휴일이었네요.


아무튼, 큰 관심을 두지는 않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김밥과 만두를 파는 오래된 가게와 버스 정류장을 지나, 메가커피 프랜차이즈점을 옆에 두고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다시 열심히 발을 옮기며 목적지의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열심히 올라가게 되었는데요. 웬 표지판이 떡하니 가게의 앞을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프로토콜은 만석이었습니다. 




아뿔싸, 평일의 이른 시간이라는 점만 고려하다 보니, 오늘 같은 휴일에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 플레이스를 찾아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이불처럼 구겨진 사고방식이 저로 하여금 막다른 길로 인도하였더군요. 에어컨 바람을 두려워하여 챙긴 겉옷은, 오히려 길바닥으로 내몰린 저에게 더위의 두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길 위에서, 그렇게 어지러움을 잠시 호소하다 눈에 새로운 카페가 들어왔습니다. 


8월 초에 새로 오픈한, 프랜차이즈 카페였는데요. 2층으로 이루어진 투썸이었습니다. 내부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왁자지껄 대화 소리와 음악, 에어컨 바람이 저를 환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연희 교차로를 조금 지나, 사러가 마트로 들어가는 도로가 나오는 횡단보도 주변, 기존의 메가 커피와 스타벅스가 양분하던 거리에 제3의 카페가 출현하였다는 사실 또한, 상당한 반가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버뮤다 삼각지대와 같은 구역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과제에 치이고 삶에 치이면서 끊임없이 카페인을 몸 안으로 집어넣겠구나 하는 생각도, 뭐 나름대로 반가웠다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새로 생긴 카페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카페 내부의 모든 자리 중에 딱 한 자리만 남아있었을 뿐이고, 저는 그 자리에 조심히 엉덩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구석 자리에서 작은 맥북을 펼친 채, 구글 크롬 탭을 오픈하였습니다. 비록 작고도 비루한 몸뚱이는 버뮤다 안에 가라앉아 있지만, 주변을 가득 채운 습기 속에 잠식된 상태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조만간 이 무더운 여름이 끝이 나고 가을이 찾아왔을 때, 먼 타지로 짧은 여행을 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구글링과 카카오맵 리뷰를 꼼꼼히 찾고, 여러 블로그 게시물들 사이를 여름 모기처럼 활보하였습니다. 이 한국 땅 어딘가에서 각자의 삶을 보내고 있을 젊은이들의 추억의 순간들을 잠시 엿보기도 하였고, 제 여행으로 연결될 팁 또한 챙길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이버 세상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고요. 카페 앞을 지나다니는 여러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저 혼자 만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눈으로만 인사를 건네었으니까요. 그래도 나름대로 보람차고 활발한 커피 타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무렵, 꼬르륵 소리가 자동으로 돌리는 위장을 느끼며,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카페를 빠져나왔습니다. 이미 오늘 저녁의 메뉴를 고른 상태였기에, 카페의 왼쪽으로 약 10여 미터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버거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게 웬 우연인지, 조금 전 카페 앞을 지나가던 친구가 식사를 하고 있지 뭡니까. 즉시 반가움의 멘트를 던지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둘의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친구는 식사를 거의 다 끝마친 상태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동장에 공을 차러 간다고 하더군요. 함께 할 의향이 있는지 제게 물었습니다. 고민할 필요가 있나 싶었습니다. 흔쾌히 수락을 한 채, 저 또한 서둘러 식사에 몰입하였습니다. 


계획하지 않은 장소

계획하지 않은 만남 

계획하지 않은 공놀이 


정말 오늘만큼은 공과 함께인 하루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건만, 결국 이 여름밤도 공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연희동의 어느 일상이었네요. 오늘도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프로토콜이 아니어도 괜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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