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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Oct 06. 2023

수치심이라는 글쓰기 선생님

'건설적 수치심'을 통한 발전

실제로 글쓰기 연습을 시작한 것은 아마 대학교 2~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꽤 활발하게 운영된다고 알고 있는 기자 지망생들의 레전드 카페 '아랑'에서 스터디를 꾸려 신문을 읽고 논술, 작문을 연습하던 때일 것이다. 그때가 23살 무렵이라고 치면 10년 넘게 글쓰기 연습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나의 글쓰기 실력은 조악한 편에 속하지만 글이라는 형태를 이용해 9년 가까이 월급을 받아먹고 살 긴 했으니 글쓰기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보겠다.


내가 내 글쓰기에서 내세울 건 (기자들 사이에서는 매우 느린 편에 속하지만 기자가 아닌 사람과 비교하면) 꽤 빠르게 일정한 퀄리티의 글을 쓸 수 있고 그것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콕 짚어 글로 잘 표현하거나, 필사를 하거나 곱씹고 싶은 예쁜 문장을 쓸 줄 아는 글쓰기 솜씨는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글쓰기 실력을 갖추는 데도 10년이 넘는 기간과 몇 번의 기회가 필요했다. (내 과거와 비교해) 글쓰기가 늘었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몇 번 있다. 내 성장의 트리거는 바로 수치심이었다. 


종종 어떤 글을 쓴 후 그 반응이나 피드백을 통해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경우가 있었다. 그때의 미칠 것 같은 괴로움 이후 글쓰기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것 같긴 하다.  




대학 시절 글쓰기 수업에서 호되게 창피를 당한 사건, '아랑'을 통해 만난 기자 시험 스터디원에게 매일 같이 듣던 지적들도 수치심을 느낀 계기였지만 기자가 된 이후 오보를 냈을 때를 생각하면 약과다.


특히 나는 미디어전문지라는 곳에서 일하면서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오보를 냈을 때 그것을 알리는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이런 기사만 쓴 것은 아니다) 오보를 지적하는 기자가 오보를 내는 일. 뒷목이 뻐근하고 머리카락이 쭈뼛한 기분이 반나절을 가는 날도 있었다.


몇 년 전 나는 오보를 썼고 한 학자가 그것을 지적하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올렸다. 오보임을 알고 바로 정정 보도문을 기사 내에 삽입했지만 당시의 당혹감과 수치심은 꽤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그날 쓴 일기는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라고 시작한다. 당시 1~2년 동안 일의 재미를 찾지 못한 터라 그것이 기폭제가 돼 일을 그만둘 생각까지 한 모양이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말. 똑똑해주세요. 흑. (놀랍게도 짤이 아니라 내가 찍은 사진임)




해당 기사는 전태일 열사가 11월 13일 분신 50년이 되면서 전태일 50 신문을 발행한다는 기사였다. 주최 측인 취재원을 인터뷰해서 기사를 작성했다. 해당 취재원은 “당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참상을 언론사에 알렸지만 보도가 되지 않았고 한 곳이 보도했다”라고 말해서 그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경향신문이라고 답했고 나는 그것을 기사에 경향신문만 전태일 분신 관련 보도를 했다고 적었다. 취재원의 말을 듣고 기자협회보와 경향신문 아카이브를 찾아봤는데 기자협회보에서도 경향신문만 언급했고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에서도 경향신문만 언급돼 있었다. 그렇기에 기사를 그렇게 송고했다.


이후 그 문구가 제목으로 된 기사를 취재원에게 보여줬을 때도 팩트가 틀린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해 한 학자가 해당 기사가 거짓이라고, 전태일 평전과 일부 시민단체는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매일경제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비슷한 보도를 했다는 아카이브가 첨부돼 있었다.


어쩌면 “딱 하나”, “유일” 이런 말을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나는 기본을 놓쳤고 오보를 수정, 기사에 정정 문구를 삽입했다. 물론 해당 학자도 “기자는 취재원의 말을 듣고 쓴 것이고 전태일 기사를 경향신문만 보도했다는 것은 상식처럼 돼있다”라고 덧붙이긴 했으나 이후 꽤 오랫동안 기사를 쓰기 싫었다. 조직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크게 위축됐다.




수치심이 트리거가 돼 성장보다 번아웃이 먼저 왔다. 기사를 쓰면 보통 누군가에 대한 칭찬보다는 비판을 하게 된다. 이것은 비평지가 아니라 다른 신문사도 마찬가지인 성격이긴 하다. 기자의 이름을 달고 정치인이나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나는 그 일 이후 내 이름을 달고 누군가를 공격하고 누군가의 잘못을 화제가 되도록 만드는 일이 싫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 상대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전화를 받은 상대의 하루를 망쳐버리는 이 일상이, 한마디로 업보만 남기는 인생인 것 같았다. 물론 즐거운 만남과 유익한 인터뷰도 있었으나 당시엔 모든 것이 싫었다.


물론 보통 기자는 하루에도 기사를 몇 건씩 쓰고 일을 하루이틀을 하는 게 아니기에 오보가 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오보를 냈으면 사과를 하고, 정정 보도문을 내고 기사 내에도 그것을 언급해야 한다. 수치심을 느끼고 오보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기사를 써나가야 하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그날 나의 일기에는 '나는 쓰레기 기사를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평범한 수준의 기자인 것 같다. 그다지 뛰어나지도 못하면서 비평을 하는 매체에 있는 게 맞는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언론사’에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번민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날 이후 1년 정도는 번아웃을 겪은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덕분에 내가 쓰고 싶은 분야의 기사를 찾아내는 성과가 있었다. 당시 출입을 하고 있던 분야 외에도 콘텐츠 리뷰나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를 썼다. 해당 분야라고 비평이나 비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보다는 견딜 수 있는 정도였다.


당시 K콘텐츠의 활약이 활개 치기 시작한 때였고 콘텐츠 업계에서도 산업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시기였다. 다행히 조직에서도 해당 분야의 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는 콘텐츠를 전문으로 쓰는 기자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출입처가 변경되고 난 후 일에 다시 활력을 찾게 됐다. 꼭 해당 '오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일이 어느 정도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분야에 대한 열정을 조직에 보여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해당 오보는 너무나 부끄럽고 기본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그 일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도 조직에게도 좋지 않은 기억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긴 하다. 긁어 부스럼인 것을 알긴 하지만 수치심과 글쓰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도 거짓된 글이기에 조금 찝찝한 일이지만 들춰냈다.




글쓰기도 그렇고, 대부분 많은 일에서 수치심을 겪고 고통을 겪은 후 한 단계 도약이 일어난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해결 방안을 궁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카고 대학 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에 대해 분석하면서 '건설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31548&start=pnaver_02



누스바움은 그의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 수치심을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338p)이라고 정의한다. 수치심은 보통 생애 초기인 유아기의 경험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뱃속에 있었을 때 완벽한 상태만을 느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와 누군가가 돌봐줘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느끼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오래된 정신분석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먼저 분석한 감정인 혐오보다 문화를 뛰어넘는 유사성을 보인다고 밝힌다.


수치심이 혐오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가지는 이유는, 수치심이 혐오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건설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지금껏 자신의 삶에 대해 지적을 받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결국 건설적인 자아를 만들고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누스바움이 말하는 이 매력적인 수치심과 이전의 학자들이 분석한, '범죄자를 낙인찍을 때 사용했던 수치심'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수치심이 어디에서부터 오느냐’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된 동기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건설적 수치심'(391p)이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 외부에서 선사(?)한 수치심이긴 했으나 동시에 내 내면 안에서도 올라왔었다. 물론 오보를 내지 않고 '건설적 수치심'도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긴 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면 건설적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선택해야 할 수밖에 없다.


마사 누스바움이 해당 책에서 내린 결론처럼,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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