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정치적인 것과 멀어진 이유
"저는 하루키를 비롯해서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소설적인 경향이 강하고 감각에만 의존할 뿐 무게감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를 읽으면서 문학 공부를 했다는 기사를 보니 걱정스럽더군요."
2013년 한국의 조정래 작가가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이 기사의 제목은 무려 “젊은 작가들 감각적 하루키 소설로 공부했다니 걱정”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201589?sid=103
해당 기사의 댓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정래의 소설처럼 묵직하게 역사를 다루는 소설이 진짜다', '하루키는 재밌지만 가볍다'부터 시작해서 '오히려 하루키는 1990년대 이후 젊은이들이 왜 탈정치화됐는지 알려주는 새로운 시대상과 개인을 그린다' 등등 재미있는 의견들이 많다.
이처럼 하루키는 어쩌면 '사소설', 즉 가볍고 야한 이야기나 하고 정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가의 대명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일지도 모른다.
10년 전 기사를 예로 들어서 조금 송구하지만 아마 지금도 많은 이들이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키 스스로도 자신이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 '그냥, 난 정치에 관심 없어'라고 넘어가지 않는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장 첫 부분은 하루키가 정치적인 것과 거리를 두게 된, 20대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해 도쿄로 나온 것이 1960년대 말, 한창 학생운동의 태풍이 몰아치던 시절이어서 대학은 장기간에 걸쳐 봉쇄되었습니다. (...)
원래부터 그룹에 소속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뭔가를 하는 게 서툴렀고, 그래서 정치 모임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생운동을 지지했고, 개인적인 범위에서 가능한 행동은 취했습니다. 하지만 반체제 파벌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이른바 ‘내분’으로 사람 목숨을 어이없이 앗아 가는 사태가 벌어진 뒤부터는(우리가 항상 쓰던 문학부 강의실에서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학생 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운동의 존재 방식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건전한 상상력이 상실되어 버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 마음속에 남겨진 것은 뒷맛이 씁쓸한 실망감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 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좀 더 개인적인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책이나 음악이나 영화, 그런 영역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장)
‘올바른 슬로건이 있어도 그 올바름을 뒷받침 해줄 영혼의 힘이 없다면 공허한 말의 나열일 뿐이다’, 나 역시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윗 기사의 댓글에서도 나왔다시피, 왜 1990년대 후반~2000년대의 사람들이 탈정치화됐는지 알 수 있는 설명이다. 모두가 같은 일을 겪진 않았겠지만 비슷한 정서를 느꼈을 터이다.
오히려 나는 20대 때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경멸했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두고 '세상이 이렇게 망조인데, 혼자만 잘 살려고 하다니 이기적이야!'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망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기사들을 수집했다...;; 그러다 보니 기자가 되었고..
여하튼 20대에도 하루키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남들 앞에서 읽진 않았다. 남들이 뭘 읽냐고 하면서 내 책 표지를 보려고 하면 '그냥 재미 삼아...'라고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보통 하루키나 알랭드 보통, 자기 계발류를 읽었을 때는 그랬다. 반면 철학책이나 사회비판적인 책을 읽을 때는 일부러 막 표지가 보이게 엎어두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던가, 그런 일을 했었다.
하루키만큼의 큰 사건은 아니지만, 20대 후반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며 '올바른 슬로건은 있지만 그 올바름을 뒷받침해 줄 만한 영혼의 힘이 없는' 정치인들이나 정당을 자주 접했던 것 같다. 몇몇 사건으로 인해 환멸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정치에만 골몰하며 일상생활은 엉망인 사람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키의 저 문장들에 내가 끌렸던 이유는, 하루키는 대놓고 정치적인 슬로건을 이야기하거나 대하 역사 소설을 쓰진 않지만, 그의 소설 행간행간을 통해 '올바른 영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써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졌는지'에 대해 말할 때도, '그냥.. 다 싫어' 류의 회피적인 발언이 아니라 '이저러저러해서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에 공감을 끌어낸다.
결국 나도 그러한 글을 쓰고 싶다. 사람들에게 멋져 보이는 윤리적인 슬로건을 크게 외치며 사람을 모으기보다는 진실한 내 마음을, 어쩌면 멋져 보이지 않는 일에도 솔직하게 '그다지 멋지진 않지만 사실 이러저러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밝힐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윤리적인 슬로건을 외치며 사람을 모으는 사람을 깔보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되고 싶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글이 비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경향을 띄는 건 맞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키의 글이 사회적인 사건에 완전히 무관심하다거나, 주류 사회 시스템에 편입되는 걸 갈망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의 글에는 종종 매우 반골적인 성향이 자주 드러난다. 또다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장이다.
다행히 그 무렵에는 젊은 사람이 가게 하나 개업하는 데 지금처럼 막대한 돈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다’ ‘사회 시스템에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찻집, 레스토랑, 잡화점, 서점. 우리 가게 주위에도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인 듯한 혈기 왕성한 이들도 근처에 자주 출몰했습니다. 사회 전체에 아직 ‘틈새 niche’ 같은 게 꽤 많았던 시절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빈틈을 잘 찾아내면 그걸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난폭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대였습니다.
자신이 운동권에 속하여있다는 식은 아니어도 운동권에 대한 호감(?)은 읽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사회 시스템에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다'라니.
또한 하루키가 너무나 사소설적인 것만 쓴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인 게, '언더그라운드'라는 사례 때문이다.
하루키의 저작 중엔 1997년 3월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가 있고, 속편 '약속의 장소'도 있다. 약속의 장소는 옴진리교 신자들과의 인터뷰 르포이다. 사실 이 저작들은 하루키의 의외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긴 한다.
실제로 이 르포를 읽어보면 피해자들에 대한 꼼꼼한 취재는 물론이고 인터뷰 윤리나 피해자들에게 취재를 하는 사람이 가지는 감정, 그래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인터뷰를 했는지까지 매우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웬만한 언론학자나 기자들의 인터뷰 윤리 강의를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촘촘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다.
언더그라운드는 '태백산맥' 만큼이나 읽기 괴롭고, 가슴 아프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3365&start=pnaver_02
하루키는 어떠한 사건에 휘말리는 희생자/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 1Q84에서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자들은 그래, 잊어버릴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해. 역사 속의 대량 학살하고 똑같아.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또한 하루키는 굉장히 많은 곳에서 사회이슈와 관련된 발언, 행위를 한다. 살짝만 찾아봐도 문학상 수상 이후 동일본 대지진 의연금으로 기부, 일본의 원자력 발전 산업 정책 비판, 관동대지진 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거론하며 코로나19로 인한 배타주의 확산에 우려 표명, 스가 총리에 대한 비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 등이 나온다.
그를 꾸준히 지켜봐 온 독자라면 그에게 붙는, 너무 사소설적이고 정치적이지도 못하고 역사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은 동의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가 소설에서 대놓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가 다른 에세이집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가는 관찰을 할 뿐, 판단은 대중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은 판단을 내려주는 소설가보다 자신의 꼼꼼한 관찰을 재미있게 풀어내 주고, 판단은 나에게 맡기는 성향의 글쓴이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
이렇듯 실질적인 그의 독자들과, 바깥에서 하루키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물론 하루키는 스스로도 어떤 무리 안에서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일본 문학계의 인사들과도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받는 오해가 아닌가 싶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3장에서도(드디어!) 일본 문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 자신이 문학계 인사들과 어울리거나 하지 않고 개인적인 일에만 골몰하는지 설명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