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도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epiphany)
1화에 이어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장은 ‘소설가가 된 무렵’이라는 목차다. 이 장은 하루키의 20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미 유명하기도 하지만 하루키가 재즈바를 운영했던 시절의 고생담과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대학시절 겪었던 정치적인 파동 때문에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를 두게 됐고, 개인의 이야기를 쓰게 됐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운데, 이 부분은 다음번에 따로 떼서 이야기해 보겠다.
이 장에서는 재즈바를 운영하던 하루키가 어떻게, 왜 소설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 장을 읽고 나면 그가 왜 언론에 불성실한 (?) 인터뷰이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안 하기로 매우 유명하다. 그를 인터뷰한 기자들은 ‘이렇게 답할 거면 왜 인터뷰를 했나’라는 감상을 남기는 모양이다.
최근 하루키는 국내 언론사와 매우 이례적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비슷한 감상이 나오는 모양새다. ‘17년 만의 국내 언론과 인터뷰’라는 대대적인 기사인데, 실제로 인터뷰를 보면 모호한 답변을 채우기 위해 하루키의 이전 언론 인터뷰 답변들을 덧붙인 걸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이 읽기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지만,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다른 인터뷰를 인용하는 것이 좀 꺼려지는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답변이 충실치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11/01/7BLOJT4WCJAMXKA6IKBG2QK44M/
답변 중 많은 부분이 "인생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결과적으로 이런 곳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등..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이다.
이러한 하루키의 답변을 두고 불성실하다는 면도 읽을 수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진짜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 왔던 듯하다. 모호하면서도 디테일한 그의 마음은 이렇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의 성향이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에피퍼니‘ (epiphany)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를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강림’이라고 나오는데 그는 이를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소설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떠한 직감에 의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야구를 보러 갔는데 그냥 갑자기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장)
이 장에서 또 한 번의 '에피퍼니'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바로 첫 소설이 소설 신인상에 당선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퍼뜩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나는 《군조》 신인상을 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로 소설가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심히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직감’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하루키이니, 기자들이 원하는 답변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을까.
그러면서 다시 한번 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삼십여 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내 안의 '뭔가' 때문에 소설가가 되기로 했고, '뭔가' 때문에 계속 소설을 쓰고 있고, 소설가가 되려면 '뭔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니.
이런 하루키이니, 언론 인터뷰에서 뭔가가 뭐냐고 아무리 물어도, 이 책 이상으로 답변이 나올 수가 있을까 싶다.
하루키가 '뭔가'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 과정은 매우 치밀하다.
보통 '감'을 통해 무언갈 한다고 하면 그 과정도 휘리리릭~ 하고 감으로 해치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여전히 2장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미안하지만, 2장에는 하루키가 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어떻게 썼는지 매우 자세하게 나와있다.
지금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초고와는 완전히 다른 글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의 초고를 썼는데 도저히 '아무짝에도 못쓰겠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놈의 '에피퍼니'(직감) 때문에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영어로 다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영어로 글을 쓰다 보니 모국어인 일본어보다 문장이 매우 짧을 수밖에 없고 직관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영어로 쓴 해당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해 보았더니, 꽤 만족할 만한 자신만의 문체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내가 그때 발견한 것은 설령 언어나 표현의 수가 한정적이어도 그걸 효과적으로 조합해 내면 그 콤비네이션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감정 표현, 의사 표현은 제법 멋지게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다. '굳이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 말이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어렵고 현란한 말을 잘 쓰는 사람들이 더 많긴 하다. 그래서 약간의 기사체(?)를 선호하는 나는 '나 같은 건 글을 쓰면 안 되나, 너무 건조한가?' 싶기도 한데 무려 하루키라는 거장이 '그런 표현 안 써도 됩니다'라고 말해주니, 다른 길도 있구나 싶은 것이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갈라포라스 김'의 전시도 나에게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줘서, 오랜만에 본 좋은 전시라고 생각했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링크로)
https://brunch.co.kr/@after6min/185
자신의 직감(에피퍼니)을 믿고,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는 것. 이것이 하루키의 특징이다. 그러니 언론 인터뷰에서도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표현들로 자신을 있어 보이게 말하기 싫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그동안 그가 받았던 질문들에, ‘불성실하다’는 평을 듣고 ‘아니, 진짜로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좀 더 자세하게 풀어봐 줄게’ 하고 해명 식으로 써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참 친절한 하루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