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에세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사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너무 뻔하기도 하고. 너무 많은 이들이 하루키를 좋아하기에,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꺼려지는 작가 중 하나이긴 하다. 그러나 좋아하는 걸 어쩌나. 그리고 힘들 때 반복해서 읽게 되는 걸 어쩌나.
특히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한다. 사실 하루키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읽히지 않는 걸 어쩌나.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를 '맥주 가게에서 만드는 우롱차'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에세이를 소설보다 더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난 항상 뭔가 핵심적인 것보다 주변부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었다. 초딩 때 SES를 좋아했을 때는 유진이나 바다가 아닌 슈를 좋아했었고, 드라마를 봐도 주인공이 아닌 서브 주인공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하루키의 에세이 중 가장 좋아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잘 안 읽는 내가 3~4번씩 읽은 책이다. 이번에 리뷰를 작성하면서 또 한번 읽었으니 5번은 읽은 것 같다. 게다가 실물 책도 가지고 있고, 전자책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해 이미 몇 번 쓴 적이 있지만, 이 책과 관련해서는 10개 정도의 이야기를 더 써낼 수도 있기에.. 또 한 번 써보도록 하겠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장부터 시작하겠다.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의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뽑아 본다면 1장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에서 하루키가 날리는 마지막 대사(?)이다.
1장에서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일은 그다지 효율적인 일이 아니라고 한다. 소설가라는 사람 역시 그런 효율적이지 않은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기에,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실 소설 쓰기는 쉽다고 말한다. 어려운 것은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내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소설을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려면 ‘일단 써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링에, 어서 오십시오.
나는 이 ‘링에, 어서 오십시오’라는 하루키의 자신감 넘치는 환영이 너무 좋았다. 챔피언 복서가 신인에게, ‘올 테면 와봐’, 혹은 ‘널 격려해’ 하는 두 가지 마음이 모두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말은, 내가 기자가 되려 했을 때 이미 꽤 유명했던 한 기자 선배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기자가 되고 싶어 안달 났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가고 싶었던 신문사의 기자들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신문사 인턴 기자를 하고 있었고, 해당 신문사에서는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대학생 독자 리뷰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저널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손석희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손석희가 JTBC 앵커로 복귀하며 센세이션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사실 어떤 기자의 술자리이든 그의 이야기가 나왔던 때이긴 했다. 그의 복귀와 함께 JTBC 뉴스의 시청률이 엄청나게 올라가고 있었고, 동시에 그의 진행방식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게 유행과도 같았던 시절이다.
한 선배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모인 대학생들에게 손석희의 진행 방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몇몇 대학생들은 비판이 나왔던 몇몇 오보를 끄집어내어 이야기했다. 자고로 기자가 되고 싶은 캐릭터라면 칭찬보다는 비판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오히려 선배 기자의 평가가 궁금해 물었다.
그 선배는 담백하게 어떠한 평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난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앉았다면 매일 그 정도로 뉴스룸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생각할 뿐이지. 내가 저 정도 기사들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할 뿐이지.”
호오, 난 그 말이 굉장히 멋져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링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관객석에서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다. (어쩌다 비평 매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비평이란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싫어하는 이유다.
하루키의 “링에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기자가 되기 전 선배 기자와 함께 했던 그 술자리, 술자리에서 선배의 얼굴 각도, 내 옆에 널브러져 있던 초록색 방석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글을 쓰면서 포기하고 싶고 이제는 더 가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장을 다시 읽어본다.
링에 어서 오라는 하루키의 손짓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하루키가 오라는데 안 가고 배길 수 있는가. 이런 망상을 하면서 다시 한번 ‘발행’ 버튼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