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생 이야기
74년 6월 서울 중화동 어느 과수원에서 아직 1남이 태어나기 전 3녀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인 아들이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러했다.
어머니는 충청도의 한섬 원산도가 고향이다.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어머니는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어찌어찌해서 서울 작은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던 중 대타로 나갔던 맞선 자리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명문대인 서울대와 카츄사복무를 마친 잘생기고 부유한 집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의 맏딸이었다. 아무런 기대가 없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님은 어머니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하셨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하였으며 결국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나와 막도동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했다.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가 다시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손을 낳는 것이었다.
집안의 대를 이어 줄 아들만 낳는다면 다시 할아버지의 그늘로 들어가 더 이상의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딸만 내리 셋을 낳으셨다
그러던 중 첫째 딸을 홍역으로 잃은 후 상심 속에서 나를 가졌고 이번에는 용한 무당을 찾아가 물어봤다 했다 무당은 뱃속아이가 아들이라고 장군 같은 기백의 기 센 아들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고 열 달을 고이고이 품은 아이가 태어난 날 또다시 딸을 낳자 배신감에 품에 안기를 거부하고 대충 싼 이불로 윗목 높이 밀쳐 버리고 젖도 물리지 않았다 했다. 하지만 나는 목청 좋게 하루를 꼬박 울어댔으며 그런 나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던 어머니는 그제야 젖을 물리셨고 나는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어머니의 소중한 귀남이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그제야 나의 어머니는 맏며느리 대접을 받으며 금위환양 마냥 시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