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사소한 것들에 다정한 하루
나의 유년 시절은 천방지축 탐험가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없이 무작정 밖으로 나가 웅덩이를 뛰어다니며 비를 맞기도 했고
눈이 오는 날이면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놀다 보면 무릎이 까지기도 하고 모퉁이에 부딪혀 깁스를 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런 것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 살이 돋아나기도 전에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깁스를 풀자마자 쉴 새 없이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살아가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비가 오면 밖으로 뛰어나가기보단
옷이 젖기 싫어 건물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날이 늘어났고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날보단 장갑을 끼는 날이 많아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이 감정에 나이를 먹으면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내가 생각한 어른은 이게 아닌데. 동심을 잃은 채로 살긴 싫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정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쯤,
나에게 사라진 동심을 찾기 위해 배낭 하나만을 메고 이곳으로 왔다.
낯선 공간을 겁 없이 탐험하며 즐거워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늘은 새벽하늘을 항상 가득 메우고 있던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새벽하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내 머리 위로 구름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 오늘 처음으로 우비를 입어야 할 수도 있겠다.'
나도 모르게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설레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아직은 내 안에 어린 시절의 내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고
내 안에 가려진 동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오늘 비가 내린다면, 모든 걸 잊은 채 두 팔 벌려 자유롭게 흠뻑 비를 맞을 거야!'
해가 떠오르고 주변이 밝아지자 예상했던 대로 하늘엔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길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여 있었다.
안개 사이를 걷자 앞머리는 금세 젖어갔고 속눈썹 위로 촉촉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안갯속의 작은 물방울들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먼저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눈길과 애정을 주어야 한다.
오늘은 나의 일상을 함께해 준 사소한 것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드디어 산티아고까지 100km가 남은 지점에 도착하자
100km가 새겨진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까미노에서 수없이 본 비석이었지만, 100km라는 작은 의미가 부여된 비석은
어느 순간부터 눈길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친 비석들을 떠올리게 했고
익숙함에 무뎌진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남은 까미노에서는 사소한 것들에 충분히 눈길을 주겠다는 다짐을 한 뒤
마을 근처 꽃향기 가득한 도네이션 바에 들어가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에 거의 도착할 무렵,
뒤에서 누군가 "캉!" 하며 반갑게 나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긍정왕 스테판이었다.
분명 우리는 버스도 타고 나름대로 열심히 걸어왔는데
스테판은 정말 빨리 걸어왔나 보다.
- "숙소는 예약했어?"
- "아니, 나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연이 닿는 대로 걸어.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거든!"
역시 스테판다운 대답이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스테판과 대화를 나눈 우리는 다시금 옷을 털고 일어났다.
- "우리는 오늘 포르토 마린에서 멈출 거야. 너도 천천히 와."
- "알겠어. 나만의 리듬으로 따라갈게."
누군가에 맞춘 속도가 아닌 나만의 리듬.
오늘도 스테판은 나에게 의미 있는 한 마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