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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블러 Oct 08. 2023

멈추길 바란 순간들 #34

Ep34.│천천히 머물러주길 바라며



포르투에서의 첫 아침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추억이 가득 자리 잡은 방 안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주인아주머니께서 부탁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까먹지 않고 준 뒤 오늘 일정을 위해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거리로 나온 우리는 주인아주머니께서 알려주신 동네 빵집으로 향했다. 이미 가게에는 아침에 갓 구운 빵을 먹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계산대의 줄은 빠르게 빠져나갔고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아메리카노와 에그타르트를 주문하고 난 우리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몸을 서늘하게 만들 때쯤 따스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신 뒤 에그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자 이런 호사가 있을까 싶었다.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 길 건너편에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보였다. 내가 시작한 프랑스 루트 이외에도 다양한 순례길이 있기에 포르투갈에서 시작하는 루트를 선택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마음속으로나마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 '다치지 말고 무사히 여정을 마칠 수 있길 바라요. 부엔 까미노(Buen Camino)!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포르투의 파란 벽화를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상벤투역에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감탄하기도 했고, 페르난두 레모스(Fernando Lemos)의 사진전을 보기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기도 했다. 맥도날드에 샹들리에와 진짜 독수리가 있을 줄이야..



이후 포르투에서 꼭 가고 싶었던 렐루 서점으로 향했다. 미리 예매한 입장권을 가지고 렐루 서점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게 앞에 서있는 줄은 그저 장관이었다.


*렐루서점 :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롤링이 해리포터를 쓸 때 영감을 받은 장소


사실 나는 해리포터의 모든 시리즈를 5번 이상 씩 돌려볼 정도로 해리포터의 광팬이다. 심지어는 아직도 언젠가 나에게 호그와트 초대장이 날아오길 바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평소 맛집 웨이팅도 30분 이상 기다리지 않는 나였지만 서점을 들어가기 위해 내 앞에 서있는 수많은 대기줄쯤이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드디어 서점으로 들어간 나는 서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파리에 이어 또 한 번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책 한 권을 사기로 했다. 스페인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았던 나는 그 기억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시작인 비밀의 돌을 보았을 때 생각났으면 더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빠르게 비밀의 돌 스페인어 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이 다 팔린 건지 비밀의 돌 스페인어 판이 없어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어린 왕자 스페인어 판을 샀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좋은 선택을 했다며 나를 토닥이고는 정성 어린 손길로 책 표지를 한 번 쓸어내렸다.


너무 열심히 돌아다닌 우리는 휴대폰과 함께 방전난 우리의 체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달콤한 낮잠을 청했다. 2시간쯤 자고 난 우리는 다시금 충전된 체력을 사용하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포르투 시내로 향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포르투 시내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문득 바라본 창밖에는 따스한 햇살이 도루 강을 포근하게 감싸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천천히 보고 싶은 마음에 이미 나의 손은 버스 정차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어느새 열린 버스의 문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우리는 그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그 풍경에 녹아든 채 도루 강을 따라 햇살을 충분히 머금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순간이 멈춰서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살랑이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파스타와 해물밥, 와인까지 실컷 먹고 난 우리는 디저트로 에그타르트와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동 루이스 다리를 향해 걸었다. 오르막을 올라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리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릴 적 출렁다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나는 유독 높은 다리 위에 있을 때 고소공포증을 심하게 느낀다. 때문에 나에게 다리 위에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란 없었기에 동원이의 아메리카노까지 손에 꼭 쥐고서는 "이거 내가 가지고 갈 테니까 내 몫까지 다리 위 풍경 사진 많이 찍어줘!"라는 말을 남기고는 머리를 정면에 고정한 채 다리 끝을 향해 걸어갔다.


무사히 다리를 먼저 건너온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사진을 찍고 걸어오는 동원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 뒤에서 걸어오던 동원이는 그런 나의 모습이 웃겼는지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키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동안 너무 많은 긴장을 해서 그런지 단 게 당겼다. 다리 아래의 풍경이 잘 보이는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나는 잠깐 아메리카노를 옆에 내려놓은 뒤 에그타르트를 집어 들었다. 역시 디저트로 에그타르트를 사 온 우리의 선택은 최고였다.


흐렸던 오후 하늘이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천천히 맑아졌고, 저 멀리 파도 같은 구름들 사이로 포근한 노란색의 노을이 하늘 위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런 하늘에는 새들이 마음껏 뛰놀기도 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시간이 멈춰주길 바랐다. 아니, 욕심을 조금 덜어내어 천천히라도 지나가주길 바랐다. 문득 지금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렇게 서서히 움직이는 저녁 하늘과 도루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금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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