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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Aug 03. 2024

후회 氏

                                    김려원

  후회 氏


    김려원



   후회 氏가 나타나면 다들 외면한단다.


   그의 징후를 얘기하는 건 어느 집안에서나 금기 사항이라 낮밤 피해 다니는데도 이유를 불문, 불문을 곡직하고 찾아온단다. 문서 끝자리에 이름 석 자를 빌려주거나 섣부른 단호함이 뛰어든 결정들, 그런 일엔 어김없이 나타나는


   노상 아우성 후회 氏


   후회 氏를 앉혀놓고 잔을 드는데 문득, 지난 일을 말소시키자고 투덜대는 후회 氏. 후회 氏는 모든 후회 氏의 집결지라서 오랜 가장의 약점이면서 오랜 아내의 효율적 공격력이라서 잔을 내려놓는데 문득, 돌이킬 수 없는 발을 걸고넘어지며 뒤엉키는 후회 氏


   한때는 재바른 결정을 했다는 거니까 빛나는 확신이 있었다는 거니까


   오래 앓은 후회 氏를 곁에서 지켜온 건 언제나 후회 氏니까


   후회 氏는 변함없이 오늘의 방문자니까 후회 氏는 바로 당신이니까


   ----변방동인 제38집 {돌의 카톡}(근간)에서



   예수가 이스라엘 왕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요’라고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고,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사타구니 속으로 도망을 가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신의 왕국을 말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친구의 사탕발림의 말에 속아 빚보증을 서지 않았더라면 전재산을 잘 지켰을 것이고, 고리오 영감이 두 딸들에게 전재산을 다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쓰디쓴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토의 여신에게 도전했다가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들을 모두 잃어버린 니오베의 후회, 제우스와 올림프스의 신들에게 그의 아들 펠로프스를 삶아 먹였다가 ‘물이 있어도 마실 수가 없고 과일이 있어도 먹을 수가 없었던’ 탄탈루스의 후회, 아르테미스 신전에다가 장녀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고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던 아가멤논 대왕의 후회, 만지는 것마다 모든 것이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미다스 왕의 후회, 언제, 어느 때나 주색잡기로 일관하다가 더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일생을 마쳐야만 했던 바람둥이들의 후회----. 후회는 쓰디 쓴 반성과 자기 비판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후회없는 삶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때나 올바른 길만을 가고,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의 선택과 그 판단에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시사철 쉬지 않고 흘러가며 나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단 한번의 그릇된 판단과 과오마저도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앙을 피할 수는 없고,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 부들부들 떨면서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자 후회의 역사이다.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사느냐가 문제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에는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노상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후회를 되풀이 하지만, 그러나 이 후회는 죽음만큼이나 낯설고 두려울 뿐인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후회 氏가 나타나면 다들 외면”하고, “그의 징후를 얘기하는 건 어느 집안에서나 금기 사항”이지만, 그러나 후회 씨는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나타난다. “문서의 끝자리에 이름 석 자를 빌려주거나 섣부른 단호함”에 따른 반작용이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계약을 잘못하거나 연대보증을 섰을 때에도 후회 씨는 나타나고, 너무나도 단호하게 보수와 진보의 편을 들거나 반여성주의와 광신적인 믿음에 빠졌을 때에도 후회 씨는 나타난다.


   언제, 어느 때나 불평과 불만뿐이고, 언제, 어느 때나 더럽고 추해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후회 씨, “후회 氏를 앉혀놓고 잔을” 들 때마다 “지난 일을 말소시키자고 투덜대는 후회 氏”, 하지만, 그러나 후회 씨는 단 한 명의 후회 씨가 아니라 “모든 후회 氏의 집결지”가 되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싸움의 장소가 된다. 후회 씨가 후회 씨의 멱살을 움켜쥐고 싸우고, 후회 씨가 후회 씨의 뒤통수를 치거나 발목을 걸고 넘어지며, 언제, 어느 때나 사생결단식으로 싸운다.


   한때는 후회 씨도 천하의 넓은 땅에 살며 천하의 대로를 걷고 싶어 했고, 한때는 후회 씨도 눈앞의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했고,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겠다고 맹서를 한 적도 있었다. 전인류의 스승들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물이 흐르 듯이 자연스럽게 살며, 더 이상 추하거나 비겁하지 않게 이 세상을 떠나가리라고 생각했었다. 이 세상은 넓고 풍요롭고,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생사를 초월하여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었다.


   천하의 대로도 없고,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만한 정의도 없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다 부질없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도 없다.


   후회 씨에 곁에 후회 씨가 있고, 후회 씨를 간병하고 있는 것도 후회 씨 뿐이다. 후회 씨는 오늘의 방문자이고, 후회 씨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후회 씨는 우리들 모두가 된다.


   김려원 시인의 [후회 氏]는 영원한 인생의 주연 배우이며, 이 세상에서 후회 씨만큼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 탄생의 최초의 기원은 후회 씨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전지전능한 후회 씨의 자손일 뿐인 것이다.


   출처- 반경환, 『사상의 꽃들 16』, 지혜, 2024, 205~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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