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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하 Aug 20. 2024

그 여름 엄마의 부채질

엄마의 생일에 보내는 편지

어른까지는 아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는 기억도 안 나지"이다. 내가 무언가 잘한 게 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그거 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00 해 줘서야!" "어휴, 기억도 못 하고......." 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처음에는 엄마 칭찬 받으려고 자랑해 봤다가 괜히 잔소리만 듣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일 년보다 조금 더 흐른 지금,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잊었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엄마가 7살의, 8살의 나에게 해 준 것들을 몽땅 잊어버린 채 커 버렸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게, 우리는 크면서 참 많은 사실들을 까먹고 부정하게 되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어느 순간부터 명절에 한복을 입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기억했으면 하는 조각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조차 잊어버린 사소한 조각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고 빛바랜 기억을 매만지며 성인이 되었다. 그 조각들 중 내가 죽는 순간의 주마등까지도 떠올릴 것 같은 기억을 오늘 이 글에 풀어보고자 한다. 오늘은 엄마의 생신이니 이 글은 회고록이자 편지가 되겠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와 등을 붙이고 잤다. 엄마가 밉거나 보기 싫어서가 아니다. 등에 아무것도 닿지 않으면 괴물이든 귀신이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잡아챌 것 같았다.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늘 엄마의 등에 나의 등을 딱 맞대고 웅크린 채로 안정감을 느꼈다. 엄마도 기억하려나. 그때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어 나는 커다란 베개나 인형을 등에 붙이고 잔다. 하지만 엄마의 온기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등을 붙이고 자지 않는 계절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여름. 내가 8살 때까지만 해도 여름에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지구 온난화가 이렇게나 심해졌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어쨌든 여름에만 내 수면 규칙이 깨졌던 이유는 엄마다.


여름밤, 잘 때가 되면 엄마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나와 나란히 누웠다. 이불은 덮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간혹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그렇게 누워서 잠들 때까지 도란도란 떠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등을 붙이고 누우면 부채질을 해 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여름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혹은 천장을 보며 함께 잠들었다. 부채는 대부분이 사은품으로 받은 부채였다. 왜, 그 손잡이는 플라스틱이고 동그란 반원 모양에 대문짝만한 광고가 박혀 있는 그런 사은품 부채. 디자인은 별로여도 그런 부채가 가장 시원하다는 사실을 엄마 덕분에 알고 있다. 그래서 길거리를 걷다가 부채를 나누어 주는 분이 보이면 슬쩍 옆으로 가서 받아간다. 그 분은 나에게 광고를 하시고 나는 여름에 시원해지고. 윈윈이다.


그 부채질은 정말 사소한 요소들로 내 마음 맨 밑바닥에 자리잡았다. 엄마는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세기로 내 얼굴에 부채질을 해 주었다. 가끔 잠에 들락말락 할 때 바람이 너무 약해져서 칭얼거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당연히 사람이니 팔이 아파서 잠시 멈추었던 것뿐이다. 그런 당연한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칭얼거렸던 나를 우리 엄마가 이렇게 공감 능력을 가진 성인으로 키워 놓으셨다.


부채질에도 소리가 있다. 부채 살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부치다 보면 지익 직 하는 소리가 났다. 지익 직보다도 조금 갸냘프고 얇은 소리다. 부쳐 본 사람이면 알 테니 이 소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잤던 것 같다. 직, 지익, 지익, 직, 직.......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밤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이토록 무더운 여름,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부채는 필수다. 한 손에는 양산을 들고 한 손에는 부채로 얼굴 쪽을 부치며 길을 걸어간다. 그런데 가끔 부치는 게 귀찮아서 가방 안에 도로 부채를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내가 나에게 부채질을 해 주는 것조차도 귀찮아서 관두는데, 엄마는 여름의 모든 밤마다 나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으니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칭얼거리면 팔이 아파도 다시 세게 부쳐 주며.


사랑이 온세상을 뒤덮을 만큼 크면 부채질처럼 작은 행동에서조차 묻어나는구나.



어제는 엄마의 생신이었다. 아직 전해 드리지 못한 손편지에는 부채질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야겠다.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사소한 방식으로 엄마의 사랑을 기억한다는 말도 꼭 적어야겠다.


생신 축하해요,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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