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함이 부른 더 큰 조급함

2025.07.07

by 여전히

현재 산페르민 축제 기간(2025/07/06-14)으로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유일하게 열린 알베르게는 선착순으로 체크인이 진행되고 10시쯤엔 도착해야 무사히 체크인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어서 오늘은 새벽 4시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날씨를 보니 6시까지 비가 내린다고 했다. 판초를 꺼내 입고 걷기 시작한 지 1시간째. 내 키만 한 풀들이 자라 있는 어느 숲길을 지났다. 얼굴에 물젖은 풀이 닿는 게 싫어 얼굴만 가렸더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판초 아래로 노출된 바지가 풀에 맺혀있던 비로 젖어버린 것이다. 비는 얼마 내리지 않았지만 풀에는 꽤 맺혀있었다. 바지는 계속 젖어가 빗물이 아래로 흘러 양말까지 젖어버렸다.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몸은 아주 찝찝한 상태가 되어버린 터.

체크인도 빨리 해야지. 옷도 어서 벗고 싶지. 나는 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수비리에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이 내가 오지 않았던 방향으로 수비리에 도착한 게 생각났다. 내가 지나간 길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마주쳤고 걸으면서도 왜 이렇게 없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비리로 오는 길이 두 개였던 것이다. 그럼 혹시 팜플로나에 가는 더 빠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구글지도를 켰고 얼마 못 가 후회는 시작되었다.

까미노 닌자 앱은 직관적으로 하나의 길만 알려준다. 어플에 표시된 빨간색 길만 따라 걷는다면 문제없이 다음 도시에 무조건 도착할 것이다. 심지어 GPS연결도 잘되어 있어 나의 현 위치를 아주 잘 잡아준다. 구글맵도 물론 마찬가지로 나의 현 위치를 아주 잘 파악하며 자세히 길을 알려주나 문제는 실시간 정보를 반영해 자꾸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열린다는 알베르게를 도착지로 설정해 걸어오는 길에서 구글은 자꾸 더 빠른 길을 제시하였고 나는 그 길이 순례자길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더 돌아가면 어떡하지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다시 까미노닌자 어플에 표시된 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어긋난 길은 연결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계속 걸은 찰나. 바닥에 노란 가리비와 화살표가 보였다

그 뒤로 까미노 표식이 더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빨리 도착하기 위해 썼던 나의 꾀에 결국 내가 넘어갔다. 일찍 도착해 봐야 얼마마 일찍 도착한다고 구글맵까지 열었나,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 또 하나 배웠다. 어쨌든 걸으려고 온 길인데 빨리 가려고 조급할 바에야 천천히 가더라도 마음 편하게 걸어야겠다.

그래도 언제 또 내가 산페르민축제 때 팜플로나에 있을 수 있을까 싶어 잠시 쉬다 도시로 나왔다. 하얀 옷에 빨간색 스카프를 두른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타국의 축제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모두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나도 저들과 동화되어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의 생각일 뿐. 힘들고 지쳐 금방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오늘의 기록>

이동 도시 수비리 4:09 -> 팜플로나 10:11

거리 24.7km

걸음 40.624

내일도 부엔까미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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