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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Jul 11. 2022

Via Negroli 2, Milano

Saya와 제노아, 우스꽝스러운 할로윈 파티

다음 날, 아직 어둑어둑한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졸음을 싸우며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평소 시간 약속은 전혀 지키지 않는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버스 출발시간은 칼 같았기 때문에 넉넉하게 20분 전에 도착해 대기했다. (버스는 8시 차였다.) 마음 놓고 빈자리에 눕듯이 기대어 못 잔 잠을 충전하던 중 Saya에게 다급한 연락이 왔다.


‘지호, 어디야?’


‘나는 이미 도착했어!’


‘나… 늦잠 자서… 지금 급하게 가는 중인데, 혹시 늦으면 버스 아저씨한테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릴 수 있을까?’


‘흠.. 알겠어. 빨리 와야 해!’


정류장에 앉아 기다리던 중 친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라픽과 셀린, 레아. 지난 투린 여행 멤버들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그들도 제노아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했고 같은 버스를 예약했던 것이었다.


어느덧 버스가 왔고 오지 않은 Saya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버스에 탑승했다. 출발 시간 오 분 전이었다. 기사님이 탑승해 서서히 버스가 출발할 채비를 했고 그럴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사야는 아직도 오는 중이었다. 문제는 설령 정시에 지하철이 도착해 하차한다고 해도 지하철역에서 버스터미널까지의 거리가 상당했다.


덜덜덜. 버스에 시동이 걸리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얘들아, 어쩌지? 아직 사야가 안 왔는데, 거의 다 도착했다는데.”


말을 들은 라픽이 선뜻 나서 주었다.


“지호, 얼마나 걸린다고?”


“삼분! 삼분이면 딱 탑승할 거래!”


라픽은 씩씩하게 운전석으로 가 이탈리아어로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손 모양을 보니 비는 것 같기도 했다.


“지호, 우선 이야기는 했는데 삼분 내로 안 오면 무조건 출발할 거래.”


“고마워 라픽 정말로. 올 거야! 아니면 내가 내려야지.”


“아니야! 아니면 그냥 우리랑 같이하자. 어때?”


서슴없이 도와주고 손길을 내밀어주는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고 마음이 놓였다.


‘사야. 달려 무조건 달려야 해. 어디야, 달려!’


거친 숨소리, 다다다다 달리는 발소리 정신없는 기계음이 들렸다. 제발… 제발! 둘이 떠나는 여행을 정말 하고 싶었다. 라픽과 그 친구들에게 정말 고마웠지만.


‘지호!! 나, 헉헉 다 헉헉 왔는데 헉헉 어디지? 어 어 보인다!’


3분이 끝나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창문 너머로 울상으로 달려오는 사야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만요!! Un momento!”


라픽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며 허겁지겁 다가오는 사야를 가리켰다. 라픽을 포함한 친구들이 본인일인 양 기사님에게 소리쳐준 덕에 사야는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다.


헉헉헉. 털썩.

순탄치 않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단잠에 빠져들었다.


밀라노에서 제노아까지는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것과 비슷했다. 못다 잔 아침잠을 채우고 나니 어느덧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있었다.

유럽의 가을답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말았다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작별하고 사야와 나는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도시를 누볐다. 성당도 보고, 사람들도 구경하고 관광지도 들르고. 사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장소는 없는 제노아였지만 항구 도시인만큼 항구에서 보낸 시간과 그곳에서 먹은 깔라마리가 가장 인상 깊었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로 시작해 따스한 햇살로 마무리한 여행이었다. 긴 시간 동안 사야와 둘이 함께하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여자인 친구 심지어 아시안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에 서로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고 위안이 되기도 했다.


Saya는 와세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똑똑한 친구였다. 항상 웃고 있어 밝은 기운을 내뿜는 친구였는데,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생겨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맑아지는 친구였다. 각자 본국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혼란 동시에 해외에 살면서 느끼는 소외감과 해방감 등 성장하며 겪은 정서적 경험들이 비슷해 순식간에 마음이 열렸다. 폰시와 마커스에게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비슷한 문화권의 같은 성별의 친구와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은 남달랐다.


우리의 여행에 시작만큼 특별하거나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다. 잔잔하게, 그저 그렇게, 비포 선라이즈의 여행처럼 대화로 가득한 하루로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위안이 되는 특별한 하루였다.




며칠 후, 할로윈데이었다. 할로윈을 챙겨본 적이라고는 초등학생 시절 미국에 살 때, 친구들과 베갯잇을 들고 사탕을 모으러 동네를 돌아다닌 것이 다였다. 한국 문화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의상을 입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다니며 술집을 전전하는 일은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건너뛰었다. 그런데 이번 교환학생 기숙사에서 할로윈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고, 회의적인 나와 폰시에 반해 마커스는 잔뜩 들떠 있었다.


파티는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참여했고, 어색해져 보기 힘들었던 로브로의 기숙사에서 하는 것이어서 얼굴 보고 사이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못 이기는 척 함께 하기로 했다. 폰시도 나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모두 참여하기로 했다.


전날부터 잔뜩 신난 마커스는 온통 분장 얘기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브레라에 위치한 분장 가게에 찾아가 줄을 서서 기다렸고, 그 결과 가짜 이빨과 피, 하얀 분, 헤어스프레이 등 이것저것 구매해왔다.


반면 할로윈 당일, 나는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 때문인지 예민해져 전애인과의 연락 도중 다투다 홧김에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어 버렸고, 이도 저도   없는 상황과 죄책감에 눈물이 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오랜 친구로 지내며 많은 시간을 함께해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던 오빠가 어찌 보면 가족보다도  위안이 되었는데,  상황에 취해 힘들다며 고집부리고 되려 화를  스스로에게 실망한 마음도 컸던  같다.


잔뜩 쳐져 조용히 수업을 다녀온 후 저녁이 될 때까지 방 안에 갇혀 있던 중, 폰시가 들어왔다. 폰시를 보자 눈물이 터져버렸다. 폰시를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눈물을 닦아주었고 안아주었다.


“지호, 넌 혼자가 아니야.”


그렇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냥 왠지 우울하고 화가 났다.

그렇게 폰시와 몇 시간을 멍하니 함께 한 것 같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파티는 10시 이후였고, 우리는 열 시 반쯤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간 시간 덕에 격해졌던 감정과 복잡했던 머리가 그저 그렇게 차분해졌다.


저녁 즈음, 마커스가 돌아왔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파에 기대 한 잔씩 하며 떠들다 슬슬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우울해있었지만 막상 준비하다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흥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와 마커스 둘만 분주해졌다. 딱히 어떠한 컨셉, 캐릭터를 따라 하지는 않았고 그저 무섭게 보이는 데에 신경을 썼다. 어차피 술 파티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얀 마커스는 더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머리에는 회색 헤어스프레이를 뿌려 아이돌로 변신했다. 그는 다 된 얼굴에 눈 아래 피를 묻혀 ‘할로윈’느낌을 얹히며 분장을 마무리했다. 반면 소파에 누워 이리저리 움직이는 우리를 구경하던 폰시는 출발 30분을 남겨놓고 느릿느릿 화장실로 향했다. 몇 분 후 폰시가 어딘가 이상한 모습으로 얼굴을 비쳤다.


“뭐가 이상한데…?”


와하하하 마커스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왜? 뭐지? 뭐야?”


“하하하하 넌 정말 돌아이야. 미쳤다고!”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뒤늦게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경악했다. 폰시의 수염의 반이 사라진 것이었다.




털이 많은 폰시는 턱수염이 진했는데, 좌우를 나눠 한쪽만 깨끗하게, 오돌토돌한 흔적 없이 싹 밀어버린 것이다. 고작 할로윈을 위해.

정말 제정신은 아니었다. 폰시는 웃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친구였다.


“아니, 폰시! 어쩌려고 그랬어. 어떡해.”


웃음도 나왔지만 걱정이 앞섰다.


“웃기지 않아? 어때, 존재감 장난 아니겠지! 걱정 마, 수염 엄청 빨리 자라서 아무렴 어때.”


지킬 앤 하이드 마냥 한쪽은 정상적으로, 수염을 깎은 다른 면은 흰 분칠 후 코에 피를 묻혀 흐르게 했다.

우리 셋은 우스꽝스러운 개그 트리오였다. 그런 모습으로 당당히 트램에 올라타 두오모 근처 기숙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착하니 파티는 이미 시작해 있었다. 친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로마 군사 복장을 한 라픽과 얼굴을 온통 파란색으로 칠한 우산을 든 블라드, 핑크색 가발을 쓴 마리아가 보였다. 라픽은 할로윈에 진심이었고 헬스로 다져진 근육질 몸이 그 의상에 딱 어울렸다. 나머지 친구들은 정체불명의 모습으로 할로윈이니까 뭐든 해보자 해서 가성비 좋게 꾸민 것 같았다.



아수라장이었다.


준비하며 마신 술 탓에 취기가 올라와있던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아직 정신없고 힘든 파티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술을 찾았다. 몇 잔을 들이켜고 나니 드디어 적응이 되었고 우리는 깔깔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자리를 싫어하는 로브로는 참여하지 않아 볼 수 없었지만, 막상 파티에 가보니 그런 것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기숙사에서의 파티는 애피타이저였다. 다들 애프터로 갈 클럽과 파티들을 이미 정해놓았고 당연히 마커스도 참여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히 취하고 힘이 들었던 나는 집에 가겠다고 했고 그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폰시도 우리 집으로 귀가했다.


꾸벅꾸벅, 트램에서 졸다 깨어보니 집이었다. 추워진 날씨에 보일러도 아직 작동하지 않아 추위를 피한 폰시가 옆에 누워있었다. 물론 우리 둘 다 옷을 모두 입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나만 옷을 갈아입고 잘 씻고 누워있었다. 파티에 입고 갔던 흰 셔츠는 블라드의 파란색 페인트로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좁은 싱글베드의 전기장판 위에서 둘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이후 폰시는 Loca라 부르며 이렇게 덥게 자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놀렸다. 원체 추위를 잘 타 전기장판을 최대로 틀어놓고 자서 그런지 힘들었나 보다.


“야, 네가 불평할 건 아니지!”


라고 하자 순응하며 웃고 넘겨버리고는 했다.


무탈하게 할로윈을 넘긴 우리와 달리 마커스의 밤은 깨나 뜨거웠던 모양이었다. 마커스뿐 아니라 이 날을 기점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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