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에게 찾아온 현자타임
아이와 치과를 찾았다 신경치료와 발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유치는 썩기 쉽다며 이대로 두면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영구치에게도 좋지 않다고 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꼭 치료해야 하는 것이 세 개, 더 커지지 않도록 막는 차원에서 손대기를 권하는 것이 네 개, 총 일곱 개나 되었다. 하지만 일곱 개의 이를 한꺼번에 치료한다는 건 어른인 내게도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키가 족히 백구십은 되어 보이는 꺽다리 의사가 반울상이 된 내 얼굴을 보더니 키를 낮추며 말했다. '어머님, 더 여러 개를 한 번에 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진정치료라 해서 웃음가스를 이용해 살짝 재운 상태로 치료할 겁니다.' 아이를 재우면 덜 아프기야 하겠지만 안 해본 치료에 대한 불안감으로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좀 생각해 볼게요 하고 소파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아이는 한편에 마련된 키즈존에서 장난감 포클레인에 앉아 바닥에 놓인 동그란 무언인가를 퍼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 번에 여러 개의 치아를 치료하는 일이 아이에게 무리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비용에 대한 부담도 밀려왔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래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 치료해 줘야지 아이도 안 아프고 나도 일에 집중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편과 저편의 생각을 저울질하다 마침내 일어서 데스크로 향했다. 간호사에게 일곱 개 중 시급한 세 개만 먼저 치료받겠다 했다. 웃음가스의 안전성과 걸리는 시간도 확인했다. 그리고 치료일을 잡았다. 아이 겉옷을 입히는 내게 간호사는 당일의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어머님 혼자 오시나요? 아버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오세요. 치료 후 계속 자는 아이들이 있어서 업고 가셔야 할 수도 있거든요."
"아 네......"
그때까지만 해도 뭐 아이 깨고 가면 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같이 가달라고 하지 않고 용감하게 혼자 아이와 치과 다녀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는 간호사의 당부대로 아이에게 음식이나 물을 먹이지 않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작년에 한 번 해본 데다 이번에는 덜 아픈 약도 먹는다고 달랜 덕에 거부반응이 심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실수에 대비해 여벌 옷도 챙겨 왔다.
몇 분 뒤, 간호사가 의문의 액체가 든 물약병을 건넸다. 아이들은 조금 맵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아이에게 안 아프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자 못 이긴 척 약병을 받아 들었다. 요즘 약을 먹을 때 늘 하던 버릇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후 하고 심호흡을 하고는 혼잣말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안 쓰다.. 안 쓰다..' 작은 입을 꼬물거리며 세 번 주문을 외우더니 고개를 젖히며 목구멍을 향해 약을 쭉 짜 넣었다.
"으악! 매워! 매워!"
불에 댄 듯 혓바닥을 쭉 내밀고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바로 물을 먹였다. 물로 불 난 혀를 진정시키고서야 아이는 소리를 멈추었다. 쓸 줄만 알았던 약이 매워서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물약이 들어가고 삼십여 분 지나자 아이가 갈 지자로 걸음을 걷고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술 취한 취객이 따로 없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이리저리 비틀거리다 넘어져 다치겠다 싶어 안 넘어지게 잡느라 진땀을 뺐다. 이십 킬로그램이 넘는 남자아이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으로 미끄러졌다 난리법석이었다. 아이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알딸딸한 취기에 어쩔 줄 몰라 계속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이를 붙드는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약이 몸에 퍼짐에 따라 아이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들었다. 누운 채로 외계어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엄뫄... 이상해여... 가뫈 있을 수가 엄써요..."
대학 들어가 처음 술을 마시고 꽐라의 세계를 경험했던 스무 살 때가 떠올랐다. 정신은 있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상황..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동기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백 미터 가는데 이십 분씩 걸렸던 만취의 추억이 소환됐다. 그 뒤로 내 별명은 '백 미터 이십 분'이 되었었다.
쓰고 보니 코미디 같은 장면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 힘에 부쳤다.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혼자 앞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져 쌍코피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술 아니 약에 취해 힘은 두 배 세 배로 세진 아들내미를 붙들고 있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잡으면 액체괴물처럼 스르륵 아래로 흘러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슬라임도 아니고 그 약이 대체 무슨 약인지 안 그래도 유연한 아이는 거의 연체동물급으로 액화되어 있었다.
약에 취해 잠들어가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혹시 부작용이 있으면 어쩌나, 아이에게 안 맞아서 통증을 다 느끼면 어쩌나 별 생각이 다 교차했다. 몇 분 뒤 드디어 아이가 잠들었다. 간호사는 아이를 두 팔로 안아 수술실(?) 침대에 눕혀달라고 했다. 축 늘어진 이십일 킬로를 목 아래와 무릎 아래에 양팔을 넣어 받쳐 들고 끙차 들어 올렸다. 들긴 들었는데 치료실까지 가는 복도가 생각보다 길었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끙차, 엄마의 파워로 간신히 아이를 잘 전달(?)했다.
그때 키가 장대같이 큰 의사 선생님이 원장실에서 나와 치료실로 들어왔다. 웃음가스는 마취가 아니기 때문에 처치과정에서 아이가 깰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깨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울 수도 있고 그러다 다시 잠들 수도 있다고 했다. 아이마다 달라서 해 봐야 안다고 했다. 나는 일단 알겠다 하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끝으로 수술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십 분도 안 되어 아이의 비명이 시작되었다.
"악! 으악! 아아아악! 알려우에요(살려주세요)! 어아(엄마)!"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치료실에 갑자기 들어가면 아이가 더 크게 동요할 텐데...' 그렇다고 내 새끼가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가만히 모른 척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그 옛날 남영동 대공분실 옆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를 듣는 갇힌 자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특수훈련을 받은 요원들이 마취 없이 내 생니를 펜치와 니퍼로 뽑는대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시간처럼 느껴졌던 십여 분이 지나고 수술실은 고요해졌다.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안 들리자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을 낳았다. '뭐지? 무슨 일이지? 왜 갑자기 조용해?' 다행히 내가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가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부분마취를 할 때 아이가 깨어 소리를 질렀는데 방금 다시 잠들어서 치료를 시작했다고, 흔히 있는 일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치료는 한 시간 안 걸릴 거라며 다시 치료실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일상의 백색소음 같았을지 몰라도, 자식이 지르는 비명을 견뎌야 했던 십 여분 동안 나는 십수 년은 팍삭 늙어버렸다. 아이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나도 같이 몸에 힘을 줘서인지 온몸이 아팠다. 후 심호흡을 하고 소파에 앉았다. 괜히 하자고 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삼십 분쯤 뒤 간호사가 다시 나왔다. 이제 두 개는 다 끝냈고 마지막 하나만 하면 된다며, 막상 아이들은 웃음가스 덕에 치료받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밖에서 듣는 부모 마음은 아프지만 아이에게는 더 낫다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이십여 분이 더 지나서야 치료실 문이 열리고 이메다 짜리 의사가 나왔다. 아이가 처음에 깨어나서 좀 힘들었지만 치료는 잘 끝났다고 했다. 한 시간여 만에 노안이 되어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어깨를 살짝 토닥이더니 이내 원장실로 돌아갔다. 드디어 나도 아이를 보러 갔다.
수술대에 묶인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안 그래도 도화지처럼 하얀 얼굴에 일부러 물감을 뿌린 것처럼 빨간 수십 개의 점들이 이마부터 양볼에까지 퍼져 있었다. 내 놀란 표정을 본 간호사가 아이가 깼을 때 온몸에 너무 힘을 주다 보니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다고 며칠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나도 안다. 며칠 뒤면 사라진다는 것을. 하지만 엄마인 내 눈에는 내 아이 얼굴에 수 놓인 그 붉은 점들이 진짜 피 튀긴 자국처럼 끔찍하고 살벌하게 각인되었다. 애가 얼마나 있는 힘껏 힘을 줬으면 얼굴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땀으로 젖어 있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그 창백한 잠든 얼굴에 다리 힘이 풀렸다. 얼마나 아프고 놀라 엄마를 찾았을까. 내가 아이한테 못할 짓을 한 건 아닌가. 내가 얼굴에 실핏줄이 터진 건 평생 단 한 번, 아이를 출산했을 때였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죽을 둥 살 똥 젖 먹던 힘까지 다 썼다는 징표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모양으로 양팔에 잠든 몸을 조심히 들어다 소파에 눕혔다. 도저히 이 상태로 늘어진 아이를 업고 혼자 주차장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이럴 때 애아빠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혼 후 처음 절실하게 남편의 부존재에 따른 현실적 어려움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싱글맘의 현자타임이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아이가 완전히 깰 때까지 소파에서 돌보겠다 하고 아이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땀에 젖은 머리와 볼을 계속 쓰다듬었다. 혈색이 좀 돌아왔을 때 귀에 대고 살살 '일어나 집에 가자...' 했다. 몇 차례 이야기하자 아이가 겨우 눈을 떴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드러난 그 맑은 눈망울을 보는 순간, 어찌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남들 다 하는 치료라는데 왜 이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던지, 눈을 뜬 아이를 안고 잘 깨어나줘서 고맙다고 찰떡같은 볼에 마구 뽀뽀를 해주었다.
간호사의 말대로 아이는 정말 자기가 그렇게 소리 지르고 묶여서 괴로운 고문을 당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어? 진짜 충치 없어졌네?' 하고 거울을 보며 신기해했다. 진짜 안 아프다고 거듭 말하는 것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날 하루는 활동하지 말고 푹 쉬게 해 주라는 병원의 안내대로 태권도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푹 쉬게 했다. 아이에게 치과가 끔찍한 기억이 아니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밖에서 소리만 듣는 부모에게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씩씩한 4년 차 싱글맘조차도 애아빠의 부존재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런 순간이 앞으로 몇 차례 더 올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약해지지 않고 담담하게 담대하게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앞날을 장담은 못 하겠지만, 어찌어찌 언덕 하나 넘은 것 같다. 이렇게 하나씩 산도 넘고 내도 건너다보면 나도 익숙해지겠지. 미리 겁낼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