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크리스마스 날에.. 저는 어떤 모습일까요? 혼자일까요, 함께일까요. 쓸쓸할까요, 이제 평안에 닿았을까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앞날을 생각하기 전에 과거를 먼저 돌이켜봅니다. 사진첩을 꺼내 12월 24~25일에 촬영된 사진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10년간의 기록을 정리해 봤습니다.
* 혼자 떠난 여행 - 4회
* 아무 기록 없음 - 3회
* 친구와 홈 파티 - 1회
* 글쓰기 - 1회
* 썸녀와 콘서트 - 1회
아.. 정말 무색무취한 날의 연속입니다.
“여자 친구는 떠나고, 친구들은 바빴고, 저는 혼자 해외로 향했습니다”.
10번의 크리스마스가 한 문장으로 깔끔히 정리됩니다.
여행지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나? 저를 촬영한 사진은 없지만 도로, 건물 사진을 보며 떠올려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익숙함”입니다. 외국에서도 같은 캐럴이 흐르고, 비슷한 설렘을 가진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행복함이 싫어 이국에 왔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지요. 다만 말도 통하지 않고 어차피 친구나 연인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줄었습니다.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다” 이 감정이 계속 여행을 하게 했습니다.
사람 많은 여행지는 피하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동남아는 한류로 인해 한글책이 많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시를 읽고 가지고 있던 노트에 필사했습니다.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문장을 옮겨적고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오랜만에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소설을 빨리 읽는 게 싫어 한 페이지 읽고 상상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동주님과 함께 차가운 북간도에 닿아보고, 볼 수 없는 누나가 있는 곳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다 졸리면 혼자 잠들었습니다.
3시에는 숙소로 돌아옵니다. 적막 가득한 방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작동시키고 침대에 눕습니다. 그대로 해질 때까지 좋아했던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다 생각합니다.
“여긴 한국인가? 외국인가?”
제 행동은 변함없고 외로움도 그대로입니다. 혼자라서 자유로운 사람도 있다지만, 저는 사람에 대한 갈증만 커집니다. 누구든 만나 대화하고 체온을 나누고 싶습니다. 샤워하고 가장 깔끔한 옷을 입습니다. 한국보다 더 신경 써서 머리 다듬고 많은 사람이 취해있는 BAR로 향합니다.
“두비두 두두!! 슈바두두~”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술집에서 저만 어색합니다. 극도로 어색해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다 또 혼자 있는 게 싫어 그냥 남기로 합니다. 사실 저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술자리의 흥겨움과 대화 그리고 몽롱한 느낌을 즐길 뿐입니다. 사람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술을 홀짝거리며 바랍니다. 오늘만큼은 하루키 소설처럼 누군가 와주기를.
한 잔 두 잔.. 술에 취해 의자에 기대고 있을 때 미소 지으며 말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뜹니다.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 가까이가 귀 기울여 봅니다.
염병! 글로벌거지입니다.
어눌한 영어로 힘든 사람을 위해 기부하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가장 힘들다”라고 한국말로 받아치고 보냅니다. 그럼 그렇지. 쓸데없는 기대한 저를 비웃으며 자리를 떠납니다.
새벽 1시 다시 익숙한 풍경이 보입니다. 술 취해 떠드는 사람들, 토하는 사람들, 클럽을 향한 긴 줄. 사는 건 이렇게 다 똑같나 봅니다. 숙소까지 걸으며 생각합니다.
“한국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혼자구나”.
여행을 통해 설렘 대신 무거운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호텔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너구리 라면을 사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야외 의자에 앉아 통통한 면을 집어먹습니다. 순간 익숙한 맛과 행복이 몸에 퍼지며 저를 기분 좋게 합니다. 하루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만족을 느꼈습니다.
10번의 크리스마스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있든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음악 듣고, 책 보고, 너구리 라면을 먹습니다. 제가 느낀 모든 감정(외로움, 행복감 등)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특별한 날 어색한 의미를 찾는 것보다, 일상의 행복이 특별한 날에도 이어지길 바라며 살고 싶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Merry Merry Christmas”
-마지막 시-
그럼 안녕
눈 구경하러 갔다 오겠네
넘어지는 데까지
いざさらば雪見(ゆきみ)にころぶ所まで (마츠오 바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