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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Nov 03. 2022

통영행 버스에 홀로 앉아

무의미한 시간을 마주한다

11월 11일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밤 11시 정각.

나는 통영으로 향한다. 


벌써 세 번째 방문. 똑같은 네 시간의 여행이 펼쳐질 것이다. 같은 길을 지나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골 마을에 도착. 그리고 첫 마을버스가 올 때까지 허름한 터미널을 서성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6년 전 그리고 10년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창밖의 어둠이 흩어지길 기다릴 것이다. 


출발 10분 전. 편의점에 들러 차가운 생수와 뜨거운 캔 커피를 산다. 생수는 단지 목마름을 위한 예방약. 어지간해선 마시지 않는다. 손끝으로 뚜껑을 잡아 곧바로 가방에 넣은 후, 긴 여행에 온기를 줄 커피를 입에 담아 차에 오른다.  


버스엔 사람이 가득하다. 가장 구석진 자리까지 둘러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해댄다. 이상한 일이다. 11시 막차는 적막과 피곤함 뿐인데, 오늘은 작은 설렘이 뒤섞여 있다. 뭐지 이 분위기는? 단풍 보러 가는 여행객인가? 아마 그런 것 같다. 오늘은 11월 11일이니까 늦가을을 잡아두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이 작은 변화는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혼자인 나는 이곳에서도 소외당해, 그들의 억지 강요에 자리를 양보하고 출입구 근처 창가 좌석에 앉는다. 빌어먹을 이 자리는 춥다고 나는 남쪽 출신이라 특히 추위를 많이 탄단 말이야. 얼른 내 자리 내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이 자리가 처음부터 내 것 인양 가방을 올리고 좌석 벨트를 맨다. 잠시 후 출발을 알리는 안내 멘트. 


"본 버스는 통영으로 향하는 심야 고속버스입니다. 약 4시간 10분이 소요되며 중간에 20분간 휴게소에 정차할 예정입니다.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매어 주십시오". 


안도감이 든다. 조금 있으면 불이 꺼지고, 떠들던 사람도 하나둘 잠이 들것이다. 어둠이 깔리면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고, 나만 아는 쓸쓸함을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마침내 차는 출발하고 나는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는다. 


얼마 후 유리창을 치고 들어오는 바람소리에 잠에서 깬다. 차 안은 태초의 적막 같은 고요함이 촘촘히 쌓여 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사이좋은 시체가 되어 알지 못하는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다. 나는 왜 죽지 않고 깨어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힘들게 하나가 되었는데, 왜 홀로 떨어져 반대로 걷고 있는 걸까? 왠지 슬퍼진다. 무한히 긴 시간을 혼자 맞이하는 게 두려워진다. 하지만 버티는 수밖에. 나는 이어폰을 빼고 어둠뿐인 창밖을 응시한다. 주황색 할로겐 조명이 지나간다. 녹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덧칠된 이정표가 나를 가르고, 불꽃처럼 빛나는 터널은 내가 잠들지 못하게 요란한 사이렌을 울려댄다. 그리고 가끔씩 어서 오세요라고 톨게이트가 내게 인사한다. 이런 것들이 계속 이어진다. 무의미의 무한 반복.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옆의 시체들처럼 알지 못하는 어떤 곳으로 천천히 침전해간다.  


"목적지인 통영, 통영에 도착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차가 완전히 정차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오늘도 우리 경부고속을 이용해주신 고객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전히 가십시오." 


결국, 통영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없다. 첫차가 올 때까지 또 다른 기다림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 시체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딘가로 나아가는데, 나는 홀로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그들이 멀어지는 걸 한없이 바라만 본다. 여기서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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