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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Feb 03. 2023

서울권 4년제 문창과 생존기(1)

서론; 후레(fresh)-문창(creative writing)이란?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는 '고3'과 '문창과 입시(힘듦)'라는 두 가지 문화를 채 겪지 못한 사람이었다. 고2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자퇴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문창과 입시학원은 여러 군데 옮겨 다니다가, 전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시들시들하게 대학원생 과외를 들었다. 운이 좋게도 선생님께서 저렴한 가격에 열심히 수업을 해주신 데다가 부모님의 완전한 원조가 바탕이 되어 겨우 대학에 붙었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학생들이 대학에, 서울권 대학, 4년제 대학에 입학하려고 발버둥 칠 때 나는 수능 시험에서 잤다. 소속감도 학력도 꿈도 심지어는 생명마저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쳤다. 남들이 책상 앞에서 희망을 품을 때 나는 잤고 이성이 아닌 감각과 충동으로 살았다. 내일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정도로.

말하자면 내게는 어떤 간절함도 없었다. 숨을 붙이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게는 절망적이었다.


자, 여기서 사람들이 주로 궁금해하는 세 가지 방점을 나도 안다.


1. 왜 자퇴했는가?

    1-1. 대체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는지?

    1-2.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닌가?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아니다.)

2. 예술 대학에 갈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2-1. 그건 '평범한 길'은 아니잖아요

3. 서울권 4년제 대학에 갔는데 수능시험에서 잤다고?

    3-1. 문창과는 성적과 무관한가? (미리 대꾸하자면 아니다.)

    3-2. 문창과 입시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무관한가?

    3-3. 이미 이 경력만으로 비범하지 않은가? (??)

4. 간절하지 않은데, 이 모든 걸 어떻게 해냈는가?

    4-1. 무엇을 향한 간절함인가에 관하여


서론에서는 부제목에 쓴 '후레문창'과, 4번의 '간절함'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 포스트부터는 순서대로 진행한다. 이 글을 가이드로 삼으면 곤란하다. 근 7년간을 한탄하는 소리에 불과할 테니까. 시리즈를 읽는 올바른 마음가짐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이다.


쓰는 마음가짐은 이렇다.


0. 너한테는 간절함이 없어


간절함에 관해 들어본 사람은 꽤 될 거라고 믿는다. 특히 예술계통에서... 일단, 나의 스승이나 보호자나 하여간 높은 분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가스라이팅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히고 들어간다.


돌이켜보면, 나는 숱한 가정환경 상의 트라우마로 인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부연 빗물보다 못한 친절이었지만, 학대와 장애와 고통과 자극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생각했다. 누군가의 상냥함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내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해갈하거나 헤쳐나갈 상황이 아녔다. 나는 만으로 열너덧 먹은 청소년이었고 경제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마시는 공기와 식단과 몸에 닿는 모든 물품까지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꿈꾸기를 원했고 노력하기를 원했고, 그걸 도와줄 준비가 된 데 비해서 나의 정서가 어떤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우리 가족은 폭발 직후의 상태였다. 그것도 십수 년간. 이 작은 아포칼립스는 노동을 위해 홀로 경기도권에 살던 아버지와 가정을 합치면서 더 무거워졌다. 개발이 덜 된 신도시에 살게 되어 우리 가족은 연고 없는 곳에 고립됐다.

설상가상 어머니에게는 시댁과 가까운 장소였다.

부친이 출근하면 모친은 홀로 남았고, 곧 내가 자퇴하며 둘이 남았다. 모친의 상태는 심각해졌고 나에게 가하는 강박적인 태도는 점차 음습해졌다. 게다가 나는 폭력적인 두 어른에게서 두 마리의 늙은 개를 지켜야만 했다. 우리는 분단위로, 돌아가며, 한 명을 증오하고 한 명은 사랑했다.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의 적인 상황이었는데 누구도 이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정리하면 이렇다.


1. 남편은 돈을 못 벌고, 딸은 공부를 못하며 입시에도 관심이 없다. 내 삶은 이 가정에 바쳐졌는데.

2. 아내는 (인정하기 싫지만) 정신상 문제가 있고, 이런 삶에서 술을 끊을 순 없고, 집에서는 개 냄새가 난다.

3. 개가 자꾸 맞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병원 가고 싶다.


하나만 해도 문제인데 이걸 다 하고 있으니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돌아가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 여기에 쓰지 못한 문제도 산재해 있었다. 돈과 종교와 친지와 혈육과 병이라는 테제 아래에서 이 가족은 늘 즈려 밟히고 있었다. 내게 삶이란 1과 2를 섞은 것이었고 3으로부터 벗어나 1과 2의 혼합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엇에든 간절한 소망을 가진다면, 그건 탈출을 향한 욕망이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퇴한 후 집에 있을 때였다.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하겠다고 수천 번쯤 생각했던 때였고, 나는 손에 쥔 미비한 돈 중 이만 원으로 인생 첫 캐리어 가방을 한 점 샀다. 언제고 도망칠 수 있게 준비해 둔 것이다. (결국 개들 생각에 어디로도 못 갔다만.)

모친은 이런 내게 미래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실은,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넌 다른 애들의 고삼 시점이고, 내년에 대학에 붙지 못하면 최종학력은 중졸이며, 예술계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럼 더 특별해야 하고, 뭐든 해야 하고, 기왕이면 천재 작가가 되는 게 좋겠고 운운.

나는 나 자신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먹고 자기만 하는데 이젠 먹는 것도 제대로 안 돼. 자는 것도. 매일 휴대폰이나 쳐다보고 있어. 아무런 생산도 얻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어. 새벽 네시에 자서 오후에 일어나. 개가 밤마다 짖어. 이것보다 최악일 수는 없어.'

간절하게 죽고 싶었던 거다. 나는 나를 이해했다.

계속해서, 세상은 '그 나이'에게 간절한 노력과 소망과 온갖 긍정을 요구했다. 나는 분명 그렇게 했다. 죽음을 소망함으로써.


1년 반 후에 문창과 신입생이 됐다.


사실, 전국의 문예창작과와 유사 학과는 카드로 쌓은 탑처럼 위태로운 시기였다. 국문학과와 통폐합이 된다는 소문에, 진짜로 된 곳도 있었고 아예 사라진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았던 게 애초에 대학이란 것도 명분뿐인 목적이었다. 내게는 목표가 없었다. 나는 원서 접수일이 끝나갈 즈음에야 떠오르는 아무 학교의 문창과에 세 개씩 지원했다. 붙은 건 2월이었다.

대학에 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합격 통보는 꽤 즐거운 소식이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방에서 뛰쳐나가 "엄마, 나 됐어"라고 말했다. 모친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좋은 이야기라는 듯이 웃기는 했지만, 조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한예종은 아니니까" 비슷한 말을 했다. (내 모친에게는 딸을 한예종에 보내리라는 작은 목표가 있었다. 그 스스로도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아서 남들이 좋다니 좋겠지, 시큰둥한 소망이었지만.)

우리는 크게 떠들진 않았으면서도, 이 성취가 참 신선한 거라는 생각은 했다.

실제로 부모님이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합격 첫인상은 모친의 반응처럼 시시한 거였다. 나는 이 학교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인생에 지대한 변화가 생길 거라는 기대조차 안 했다. 입학까지는 많이 남았고, 대학 신입생에 관해 진짜 아무것도 몰랐으며, 캠퍼스 로망은 무슨 내일 해가 안 떴으면 좋겠다는 지구멸망과 자사의 꿈이나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가 두서없는데, 대충 이렇게 요약하겠다


그래서 후레-문창이란?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나에게 성큼 다가온 신입생(fresh) 생활... 그리고 문창과...


지금 생각해 보면 예술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던 게 다행이다. 당시 내게 필요한 건 긍정적인 작용을 해주는 무리였다. 인문대였다가 예술대였다가 그 소속이 불분명하고, 장래도 불안정하긴 했지만, '신입생' 무리에 껴서 활동하는 건 퍽 평범하고 즐거운 터였다. 문학을 좋아했던 건 부수적인 이야기다.

나는 경기도로 이사하며 중학교까지의 인연과 단절됐고(다행이다), 고등학교는 급하게 자퇴하면서 그렇게 됐다. 대학 동기들은 내 오래간만의 친구가 돼 주었다. 여전히 그러한데, 먼저 다가와 주고 내게 무리를 나눠준 친구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근데 지금 나만 졸업 못했다.

아무래도 후레문창이군...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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