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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 Feb 14. 2023

마음이 무거워서 순간이 즐겁지가 않아

이러다가 한국 가는 걸까

[1] 3년 전 발리와 지금 발리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나에게 있다.


그것은 3년 전에 비해 지금은 나에게 없는 게 아주 많다는 점이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체력까지 없다.


어떤 걸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비전은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쉬지 않고 노력했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버텨본다.

서핑도 그렇다.

서핑은 다시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또 컨디션이 나빠졌다. 내가 서핑하는 모습을 보면 파도 위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건 비단 서핑만 그런 게 아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미드랭스(롱보드도 숏도 아닌 8~6피트 대 보드를 말한다)를 타는 사람의 영상을 오랜만에 찾아보았다. 내가 도전할 수 있을 법한 레퍼런스 영상을 솎아 내는 일마저도 쉽지 않았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모든 일이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거 같다.


여태까지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패들 근육을 키우고, 스트레스받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보드 컨트롤이 되기만을 바랐다.


테이크오프나 첫 턴, 그리고 패들이 아직까지도 도돌이표라서 어떤 스타일로 타고 싶은지 다음 단계를 진지하게 꿈꿔보지 못했다.

병 안에 갇힌 벼룩은 나중에 뚜껑을 열어놔도 더 이상 병 높이 이상으로 뛰지 않는다는 유명한 벼룩 실험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벼룩은 그 통에 갇힌 동안 얼마나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받았으면 그 이상 뛰지 않기로 한 걸까? 사람으로 빗대어 공감해 보면 꽤나 마음 아픈 일이다.



[2] 배낭 하나에 며칠 동안 입을 옷과 카메라만 챙겨서 가볍게 스미냑에 이사를 왔다.


만 오천 원짜리 도미토리 방에서 지내다가 만 팔천 원짜리 개인 방으로 삼 천 원어치 업그레이드되었다.

서핑은 3일 쉬기로 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1층 현관에는 리셉션처럼 생긴 긴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 이름이 적힌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고, 봉투를 열자 안에는 손으로 쓴 편지와 방 열쇠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간단한 환영 인사와 함께 숙소의 와이파이 비밀번호와 왓츠앱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내 방 번호는 2층 6번 방이었다. 어둑하고 조용한 계단을 올라가 길지 않은 복도 끝에 있는 6번 방 앞에서 멈췄다. 다소 허술해 보이는 철문을 여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아, 운 좋았다. 이사 오는 길에 저 비를 맞았으면 최악이네.‘


비는 토독 토독 내리다 거세진 것이 아니라 2층으로 올라오는 그 짧은 10초 사이에 스콜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넓은 야자수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귀를 때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불과 몇 분 차이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운이란 게 별 게 아니라 이런 크고 작은 환경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운세는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흐르고 있는 개념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모래사장에 떨어진 산호조각이나 조개껍질처럼 서로 영향을 주면서 쉼 없이 구르고 움직인다.



[3] 요즘 발리는 매일 지겹도록 구름 낀 날씨의 반복이다.


우기라는 걸 감안해도 이건 좀 심하다. 지난 두 달 동안 발리의 붉은 선셋을 본 적이 없다. 분홍색이나 보라색 하늘만 겨우 두세 번쯤 볼 수 있었다. 다리를 다쳐 호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그 주에만 예전과 같은 선셋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있었다 해도 횟수가 너무나도 적다.


날씨가 거의 안 좋다 보니 비가 안 오는 날은 흐린 날도 고맙다. 그러다가 비가 조금 오는 것도 감사해지기 시작한다. 행복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다. 좋은 날씨는 이제 기본이 아니다.


해가 자꾸 구름 뒤에 숨어도 해는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지나면 구름은 지나갈 것이다. 바람이 불면 더 빨리 날아가겠지. 같은 위치에 새로운 구름이 다시 생길지라도 오늘의 구름은 지나간다.


그래, 발리를 떠나는 날까지 옛날에 봤던 그림 같은 선셋을 다시는 못 봤다고 치자.

그래도 발리에서 뜨는 그 해가 한국에서도 뜬다. 아니야, 발리에 올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겠지. 갈수록 바라는 것도 궁핍해진다. 잠깐만, 혹시 이것도 벼룩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는 과정인가?


어쨌든 발리에 와서 계속 연습하고 있는 건 완벽을 내려놓는 일이다. 완벽은 욕심과 같다. 욕심이 많은 것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거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관대해져야 한다고 되뇐다.



특히 사진이나 영상이 그렇다. 기회가 오면 너무나도 잘 찍고 싶은 욕심이 든다. 좋은 사진이나 영상을 가리는 눈은 있는데 직접 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한두 번의 시도로 만족스럽게 끝내는 일이 없다. 집착하다 보면 결과가 있겠지만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완벽을 선호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결국 그러다가 시간 거지가 된다.


부족해도 붙잡지 말고 넘어가야 한다.


미련이 많다. 해낼 수 있는 일에 비해서 눈이 너무 높고 날카롭다. 그러지 말고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를 뛰어야 한다.


[4] 어제 모기 물린 곳이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프다.


이사 온 이곳의 모기는 물리고 나면 아픈 모기다. 모기에도 몇 가지 타입이 존재하는데 잠깐 참으면 물린 지도 모를 모기, 붓는 게 심한 모기, 간지러운 느낌이 심각한 모기.

이번 모기는 아픈 모기.


2/13 새벽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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