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동화 속 이야기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준다. 대표적으로 신데렐라는 불운한 환경 속에 계모의 구박을 받다가, 왕자님이 나타나 그녀의 현실을 구원해준다. 이는 ‘순종과 기다림’이라는 마술적 믿음을 키워나가게 한다.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바꾸어줄 거라고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만든다. 즉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인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남자를 기다리다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토미 웅거러의 <제랄다와 거인>은 다른 공주 이야기와 다르게 여성의 주체성이 돋보이는 그림책이다.
표지를 살펴보면 섬뜩한 느낌을 준다. 칼을 든 채로 험상궂게 웃고 있는 거인과 해 맑은 미소로 그 거인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책의 첫 장부터 거인은 시뻘건 피가 묻은 칼을 쥔 채, 아침밥으로 어린 아이를 잡아먹는다. 거인은 날마다 마을로 나가 아이들을 잡아간다. 그로 인해 마을은 활기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골짜기에 사는 제랄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지 못한 채 아픈 아버지를 대신하여 마을로 심부름을 간다. 숲 속에서 흉악한 거인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거인의 성에 공식요리사가 된다. 게다가 아이를 잡아먹는 거인의 식습관을 변화시키고, 이웃에 사는 거인들까지도 변화시킨다. 드디어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제랄다는 세상을 변화시킨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이용해 거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세상을 움직였다.
제랄다는 원래 음식 만들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 여섯 살 때부터 다양한 요리법에 정통할 만큼. 길에서 쓰러져 있는 거인을 발견하고, 굶주렸다는 판단 아래 맛있는 요리를 해준다. 상대방을 세심히 관찰해 가장 필요한 것을 준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난생 처음 맛본 거인은, 어린 아이를 잡아먹을 생각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리고 성에서 요리를 해준다면,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성으로 아버지까지 모시고 와, 온 나라에서 제일 좋은 식료품을 이용하여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보고,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친다. 거인의 욕구와 소녀의 욕구가 정확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그녀는 음식을 마음껏 만들어서 좋고, 거인은 맛난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으니 좋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제랄다는 아름다운 처녀가 되고, 거인도 수염을 깎고 말쑥해 진다. 둘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게 된다. 둘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제랄다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거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을 위해 좋은 것을 해주길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먼저 해줄 수 있는,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제랄다의 내면에 있었다. 반면 거인은 제랄다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마냥 환상 속 마법을 심어주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때 더 단단해진다는 현실적인 메시지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