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은 넓었을까, 그래서 너그러운 그림자를 드리웠을까, 둥지를 몇 개나 품었을까, 꽃과 열매는 열렸을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가공한다
나를 쓴다는 건 닳아 없어진다는 뜻 하얀 세상을 검게 멍들이니까 쓸 수 있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짧다 거추장스러운 몸과 뼈를 갈아내고 드러낸 흑심만이 손을 움직이게 해 갉아낸 껍데기가 쌓인 무덤에는 모터가 들어있다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지만 소멸에 가닿는 길고 각진 나의 형태 쥔 손은 오롯이 남기는 일에 집중한다 획을 그을수록 담기는 것이 많으니까
나는 나무였다가 꿈이었다가 마음이었다가 글이 된다 시간을 쓰고, 짧아진다 놓지 못하므로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