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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30. 2022

1. 여행이 가고 싶어서

자니...? 자는구나... 보고싶다, 여행




코로나가 발생했던 때를 기억한다. 막 뉴스에 특정 나라의 지역명으로 전염병이 생겼음을 알리던 시기. 나는 베트남 여행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불안한 사람을 위해 마스크를 파는 사람이 보였다. 한국의 지하철처럼 버스 안으로 들어와 열렬히 호객을 하진 않았지만. 장사꾼은 막힌 찻길을 누비며 마스크를 흔들어댔고 원하는 사람은 차 창문으로 돈을 건네고 마스크를 샀다. 나는 사지 않았다. 이제껏 세계를 뒤흔든 수많은 전염병이 내 일상을 망가뜨리지 못했듯 코로나도 그러리라 믿었다. 


이러다가 금방 사라지겠지. 신경 안 쓰고 있으면 알아서 없어지겠지.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작년까지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우리 코로나 끝나면 만나자, 코로나 확진자가 좀 줄어들면 놀자. 그렇게 조심했고 희망이 현실이 되길 기다렸다. 지금은 코로나 끝나면 만나자는 인사말을 안 한 지 제법 되었다. 꼭 허무맹랑한 소원 같다. 하다못해 마스크만 벗고 싶다고 외쳐대지만 로또에 당첨되고 싶다고 외칠 때와 비슷한 심리다.


그런 상황에서 베트남 여행은 굉장히 운이 좋았다. 걱정 없이 온전히 즐기고 스트레스를 해소한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쌓인다. 낯선 곳에 가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해방으로 여행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의 묘미는 이제 느끼기 어렵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에 취하거나 한국과 전혀 다른 날씨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는데. 이젠 해외는커녕 국내도 불안하다.



여행을 갈 때마다 내게 보낸 엽서들.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베트남은 내 안에서도 마지막 여행이었다. 술술 빠져나가는 돈을 잡아두고 싶었다. 앞으로 구두쇠가 되리라. 그런 다짐을 하며 나를 다잡기 위해 있는 돈을 모두 탈탈 털어 출발했다. 말하자면 이별 여행이었다. 소비와 이별하기 위해 소비한 셈이다. 10일의 짧은 여행을 샅샅이 적어두리라 생각했지만…….


소비를 하지 않기 위한 소비에서 보이듯 나는 다소 즉흥적인 사람이다. MBTI로 치면 철저한 p. 무슨 관계냐 싶겠지만 이 즉흥적인 사람은 나와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다. 미루다가 여행 일지를 쓰지 않았단 뜻이다. 


게으름을 부렸다. 하루를 정리하기엔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아! 그러려고 여행 간 건데 여행 가서도 부지런해야 해? 우리 좀 쉬자. 한국인은 호캉스도 바쁘게 다닌다더니 여유로울 수 있을 때 여유를 좀 갖자! 그리곤 곧바로 침대에 엎어지기 바빠서 일정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떠오르는 것들. 


뜨거운 여름 햇살, 처음으로 서핑을 배웠다. 시작 전에 부상 당해도 업체에서 책임지지 않으며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단지 두려웠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심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를 쫄게 한 원인이었다. 파도를 타고 나아가면서도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나려고 무릎을 펴다 겁에 질려 스스로 넘어졌다. 서핑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안타까워하셨다.


“넌 할 수 있어. 충분히 잘하고 있고,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인데 왜 무서워서 주저하는 거야?”

정확히 이 말이었냐 묻는다면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할 수밖에. 그래도 용기가 생겨 일어섰는데, 어, 일어나지네? 신기했다. 일어날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때 일어난 경험이 몇 년 동안 나를 일으킨다.

쾌감이 엄청나더라. 내 발아래에서 흔들거리는 물이 느껴졌다. 물 위에 서 있다. 말을 탈 때처럼 불안정해서, 파도가 꼭 살아있는 존재 같았다. 바람이 시원하다.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흩날린다. 상쾌하다. 앞 풍경은 결코 평소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해변을 마주 보다니! 포세이돈이 된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알았는데 발에 상처가 났다. 상처 사이로 모래가 들어가 걸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모래가 괜히 상처를 키울까 봐 겁도 났다. 파상풍같이 외부에서 오염되어 곪는 온갖 종류의 병이 있었으니까. (파상풍이 외부 오염으로 인한 병이 아니라면 유감이다. 내 짧고 얕은 상식에선 그랬다) 약국에 가서 바디랭귀지로 겨우겨우 대일밴드를 샀던가. 울적했던 나는 굳이 굳이 아픈 발로 걸어 맛집에 찾아갔었다. 이게 서핑한 하루 동안 했던 일의 전부다.



응원은 안 되던 것도 되게 한다! 



겁 없이 근교에 갔다가 숙소로 돌아가지 못할 뻔한 적도 있다. 버스가 밤늦게까지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숙소는 이미 잡아뒀고 이 동네 숙소는 좀 비싸서 고민이 많았다. 말했다시피 내 남은 돈은 탈탈 털어 간 거라 돈을 최대한 아껴야 했으니까. 돌아가려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 전에 자전거 인력거를 후불로 탔다가 바가지를 잔뜩 썼기에 내키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했다. 와중에 유심칩 데이터는 제대로 잡히지 않고…….


다행히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인 커플을 만났다. 어디였더라? 한국 카페였을까? 베트남 여행을 위한 카페에 같이 택시비를 내고 돌아갈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는지 길거리 캐스팅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소심한 내 성격을 보건대 전자였을 확률이 높다. 한국인 커플도 택시를 타고 갈 생각으로 왔는데, 생각보다 그 시간에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근교라곤 해도 제법 거리가 있던 탓이다. 


우리는 흩어져 방방곡곡 아직 영업하고 숙소까지 데려다줄 비교적 싼 가격에 운행해주는 택시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한국인 커플이 금액까지 합의된 택시 드라이버를 구해서 돌아갈 수 있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까짓 노숙하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첫 베트남 여행에서 느낀 베트남 상인은 자기 PR이 너무 강했다. 겁이 날 정도였는데, 노숙 중에 저돌적으로 자기 PR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베트남 여행 전체가 기분 나쁘게 변질될 거 같았다.


다른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동안 로망이던 베트남 전통 의상을 사 입었을 땐 정말 설렜었다. 자전거 인력거를 잘못 탔다가 바가지를 썼을 땐 지치고 우울해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후. 길거리에 놓인 자전거 인력거는 결코 후불제로 타지 않는 걸 추천한다. 


맛있던 음식은 빼놓을 수 없다. 고수를 싫어하는 주제에 길거리 반미는 고수를 무조건 넣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넣었는데 세상에, 인생 반미가 되어버렸지 뭔가. 베트남은 프랑스 음식이 맛있다기에 무작정 찾아간 파스타 집은…… 아직도 그리움에 차 꿈에 나올 지경이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은 더위를 물리치는 힘이 있었고. 메모해둔 게 없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추억을 떠올리다니. 제법 즐겼나 보다.


여행이란, 여행 간 순간부터 그 뒤로 평생토록 소비할 수 있는 굉장한 콘텐츠다. 떠오르면 그립고 행복한 감정의 보관소다. 그런 여행을 잃다니 삶의 낙이 다소 사라진 셈이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낙을 괜히 떠올렸다.


2년이나 지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추억은 점점 더 미화되고 사랑하던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가 이토록 사랑했는데. 이토록 뜨겁게, 연인보다 더 사랑했는데.


왜 만날 수 없는 걸까? 여행, 너란 녀석, 어떻게 해야만 가질 수 있을까?


가고 싶다. 만나고 싶다. 여행.


원래 하지 말라면 가장 하고 싶은 법이다. 시큰둥하던 게임도 서버 종료한다면 밤을 지새워서 엔딩을 보고 지루한 책도 막상 없으면 그립다. 좋아하던 것이 사라지면 정말 미치겠다. 마음 편하게 여행을 가지 못하니 여행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잠재울 방법을 찾아 책을 펼친다.



90일동안 나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빨간 사람. 7살이다.



유럽 일지다.


여행 중 가장 오래 기억나는 곳은 유럽이다. 인생 첫 혼자 여행이었다. 유심칩이나 유레일패스 같은 기본적인 것은 물론 계획조차 없이 처음 일주일 숙소만 잡고 떠난 여행. 참 어리벙벙했었다. 많이 힘들었고 즐거웠다. 짜증 났고 행복했다. 무기력했지만 활기찼다. 평소 일기라곤 써본 적 없는 내가, 약 90일의 여행 중 68일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쓸데없이 길게 쓰는 걸 좋아하는 덕에 여행했던 순간의 감정과 상황과 조명, 온도, 습도까지 모조리 적은 책이다. 


잠시 읽는 것만으로 다시 여행을 온 것처럼 행복해진다. 헤어진 여행이 덜 그립다. 일지 외에도 50명이 넘는 친구, 친척, 지인에게 엽서를 보냈으니 유럽 여행은 기록의 여행이기도 하다.


책을 읽을 때 처음 읽을 땐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기분이, 두 번째 읽을 땐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세 번째 읽을 땐 막역지우를 만나는 기분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행도 같지 않을까. 낯선 도시와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여행하는 순간이라면 그때의 추억과 친해지는 과정이 당시의 사진과 글을 읽는 순간이다. 여행과 막역지우가 되는 상황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를 추억하며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가 아닐까.


좀 끼워 맞춘 것 같은가? 맞다. 살다 보면 뻔뻔해야 한다. 각설하고!


그런 이유로, 세 번째 여행을 다녀올까 한다. 벌써 7년쯤 전 여행이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서 그때의 고민이 낡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미숙해도 패기와 에너지가 넘쳤던 내가, 처음으로 세상과 맞섰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나름 노련해졌어도 기력 하나 없는 지금의 내가 살필 것이다. 과거의 무모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배우게 될지. 세 번째 여행이 벌써 기대된다. 현재에서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자 과거가 현재에게 떠드는 추억.





처음은 처음으로 열어볼까 한다.


새해의 설렘, 처음의 긴장, 모든 것을 기억나게 만드는 첫 시작. 마침 이 글은 2022년의 첫 달에 쓰고 있지 않은가. 첫 여행의 설렘을 올해 내내 안고 갈 수 있도록. 첫 글의 첫 에피소드는 첫 시작,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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