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나에 대하여
뭐든 흥미로우면 일단 시작하는 것까진 쉽다. 근데 그 이후로 발전이 안 된다. 얕게 익히고 금방 질린다.
초딩 때 학교에서 단체로 리코더 합주대회를 준비해서 나갔다. 그 덕에 나는 소프라노 리코더로 밤의여왕 아리아를 불 줄 알았다. 엄지 컨트롤을 해 높은 도에서 더 높은 도레미까지 불어야 하는 악보였는데 그걸 해냈었다. 나만 해낸 건 아니고 소프라노 친구들도 같이. 합창단으로 무대에 선 적도 있다. (전교생이 다 필요한 무대였다.) 이후에도 음악 쪽 소질이 있단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음악을 잘하나 보다 했다. 어린 마음에 음악 쪽으로 꿈을 잠깐 꿨다. 노래를 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가수를, 청음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작곡가를. 나중엔 작곡보단 작사가가 하고 싶었다.
크면서 음악에 흥미가 좀 떨어졌다.
꿈들은 다 비눗방울 같았다.
아빠가 같이 색소폰 배우러 다니자 했을 때 나는 좋다고 했다. 색소폰 하나를 사주고 같이 가서 첫 수업을 듣고, 두번째 수업 때 넬라 판타지아를 냅다 불었다. 악보 없이 내가 기억하는 음으로만. 선생님께서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 이후로 흥미가 떨어져 수업에 가지 않았다.
아빠도 가지 않았는데 내 색소폰만 중고로 팔아버렸더라. 아빠 색소폰은 아직 있는데 골동품이 되었다.
더 크면서 시를 읽고 써보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시나 에세이를 읽는 게 좋았는데 어느새 내 이야기도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인스타에 내가 쓰는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근데 누군가 읽어주기 시작하고, 팔로워가 늘어났다. 나는 점점 글쓰는 게 재밌어지고, 읽어주는 분들의 반응이 중요해졌다. 필요해졌다고 쓰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잘 쓴다, 글 좋다 등등 그 반응을 위해 글을 쓰고 더 깊은 내 이야기들을 시로 에세이로 편지로 쓰다가 결국 그 글들을 모아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그걸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 그러나 팔로워 3,300명 중에 내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작가의 꿈을 꾸기엔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 싶어 나는 그대로 글 계정을 없애버렸다.
글 계정을 하면서 사진도 같이 올렸는데 사진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내 흥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글쓰기를 관두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물 위주로 타이트하게 들어가서 찍는 걸 좋아했다. 주로 꽃사진을 찍는 걸 즐겼다. 꽃이 피어있는 것 말고도 꽃의 다양한 모습들. 지고 있거나 이미 진 것도 다 내 나름대로의 구도와 감성으로 찍었다. 그 다음으로 좋아했던 피사체는 파도. 파도는 매순간 다른 모양으로 찍히기 때문에 질릴 새가 없다.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찍기 시작하니 카메라가 필요했다. 카메라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가 구하기엔 중고가 적절했다. 중고장터에서 오래된 디카 하나를 20만원 내에 구했다. 소니의 NEX-5R. 내 예산으로 구할 수 있었던 최상의 컨디션을 찾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카메라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정말 너무 기뻤다. 꿈이 또 자라났다.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몇 년 후, 그 낡은 똑딱이로 별을 찍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수 생활을 청산하기 전까진 그랬다.
백수생활의 끝을 알리는 합격 전화를 받았고, 카메라에 대한 열정은 좀 사그라들었다. 틈이 나면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 쉬어야 했다. 2년의 지옥 같은 회사 생활로 내가 이룩한 내일채움공제 만기 덕에 나는 카메라를 업그레이드할 돈이 생겼다. 그 돈으로 나는 소니의 풀프레임 미러리스 A7M3와 렌즈 2개, 필름카메라 두 개를 질렀다. 사그라든 줄 알았던 흥미가 다시 올라왔다. 새 카메라가 생겼다.
새 카메라로 처음 찍은 건 거제도 바다와 애인이었다. 놀러 가서 새 카메라와 새 렌즈로 처음 찍은 것들은 매우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똑딱이랑은 절대 비교불가였다. 왠지 전문가가 된 것 같은 느낌. 카메라를 바꾸니 결과물도 꽤 나아져서 전보다 더 괜찮은 사진들이 나왔다. 주변 사람들도 평가가 좋았다. 그러나 흥미 취미에서 발전하진 않았다. 스냅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얼마 전 사촌동생 결혼식에 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취미로 찍는 거니까 가볍게 찍겠다 했다. 본식 스냅 작가는 따로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드레스 입은 걸 보니 열정을 다하게 되어서 1,000장 넘게 찍어왔다. 몇 장 셀렉하고 라이트룸으로 빛 보정이나 구도 수정만 살짝해서 보내줬는데 너무 잘 찍었다며 고맙다고, 본식 작가보다 잘 찍었다는 과분한 칭찬이 돌아왔다. 두둥 ,, 칭찬을 받아버리면 또 꿈이 모락모락 자라는데. 역시 나는 사진가가 되고 싶은가.
며칠 전에도 결혼식 사진을 찍었다. 찍어서 봤더니 나름 잘한 것 같더라. 물론 직업작가분들이 훨씬 잘하셨겠지만, 옆에서 찍고 있으니 서브스냅작가분께서 나한테 본격적이라며 스냅작가 해야겠다며 바람을 넣어주셨다. 덕분에 어제는 잠깐 스냅작가 구인글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런 글을 왜 쓰고 있는가. 얕고 짧게 발만 담갔다 빼는 취미만 가진 내가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기 때문에.. 누가 칭찬만 좀 했다 하면 냅다 직업까지 생각해버리는 어리석은 나에게 누가 제발 미래의 나를 좀 보고 와서 얘기해줬으면 좋겠다. 너는 무조건 이걸 하면 된다, 하고. 사진은 취미로만 하고 직업은 다른 걸 하면 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사진을 취미와 직업으로 삼아도 될까. .. 모르겠다.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