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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소지 Jul 07. 2024

1인 3역, 모두 완벽하게 잘 하기는 글렀지만...

임산/출산, 미국 지사 이동, 대학원 졸업을 한 번에 하는 빡센 인생

2024년은 내 인생에 이런 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제 겨우 반절을 지났지만 인생에서 가장 빡센 한 해가 될 예정이다. 임신/출산, 미국 지사 이동, 대학원 졸업 중에 내가 계획했던 것은 대학원 졸업 뿐.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지만, 이렇게 인생에 중요한 일들이 한 번에 덮치는 일들은 처음이라 어느 정도 압도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는 성격은 아니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일들이라면 빠르게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라 큰 스트레스 없이 이 3관왕 상황을(?) 차곡차곡 진행해나가고 있다. 


다만, 몸은 한 개이며 한정된 집중력과 체력을 3가지 요소에 고루 쏟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우선순위를 지정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가장 적극적인 의지로 진행하게 되었던 대학원 졸업이 가장 낮은 우선순위를 얻게 되었다. 올해 들어서도 한 번 가면 8일 정도를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쭉 머무르며 수업을 진행하는 모듈을 4번이나 진행했고, 시험도 보고 조별과제도 하였는데, 특히 상반기 동안 진행된 수업들이 마침 딱 임신 초기였던 떄라, 너무 졸리고 피곤하여 도무지 수업에 집중이 되지가 않아 거의 유체이탈급으로 몸만 강의실에 덩그러니 놓아져있는 상태로 올 상반기 수업들을 보냈다. 20대 초반 어릴 때처럼 시험 전 날 자료 한 번만 봐도 A나 A+를 받던 기적의 날들은 오지 않았고, 수업 전에 미리 온라인으로 제출해야 하는 사전과제도 정신 없이 놓치는 바람에 C급 성적을 꽤나 수두룩하게 받게 되었다. 대학원 졸업에 대한 나의 목표는 하나. 과락만 하지 말고 무사히 졸업장만 받자. 마지막 남은 석사논문 대체의 조별과제가 조금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반드시 졸업하도록 하자!


미국행은 나의 막연한 바람과 회사의 필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우연히 진행된 일이지만 앞으로 나의 인생과 아기의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는 환경의 변화이기 때문에 이사 준비를 하고 L1 비자 준비를 하는 것에 꽤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임하는 중이다. 회사가 고용한 미국 이민법 변호사사무실의 준법률전문가(paralegal)와 끈임없이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비자서류를 준비하고,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얼마 전에는 변호사와 직접 콜을 진행하며 서류를 훑어보고 인터뷰 시뮬레이션을 진행하였다. 콜이 마무리 되어갈 때쯤, 혹시 몰라 변호사에게 "내가 현재 임신 중인데 이것이 비자 발급에 이슈가 될 수가 있나?"고 물어보자 변호사는 "미국은 관광비자로 들어가서 출산하는 것에는 예민할 수 있지만, 너의 입국 목적이 비이민 취업/경제활동으로 분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그런데 혹시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미국시민인지?"를 물어서 "그러하다"고 대답하니 변호사가 머리를 싸쥐며 "오마이갓! 그것이 내가 우려할만한 것이었어!" 


변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비이민 비자 소지자가 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 영주하게 되는 것 역시 미국에서 딱히 열광적으로 반기지는 않는(?) 인구유입이라고 하였다. 무비자 미국 입국 시 젊은 미혼 여자가 "남자친구를 보러 왔다"고 하면 빠꾸를 당할 확률이 높은 것과 일맥상통이다. 나는 변호사의 설명을 듣자마자 손사레를 치며 "아, 아이아빠가 미국시민이기는 하지만 그와 나는 결혼을 통해 가정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고 코멘트를 달았지만 변호사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을 1초 보여주더니 다시금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돌아와 "그건 나중 문제이니, 우선 비자 인터뷰 당일에는 깔끔한 비즈니스룩을 입어야 하며 배가 잘 드러나지 않게 루즈한 옷으로 커버를 잘 하고 꼭 블레이저를 입으라. 숨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드러내서 추가적인 질문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오히려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될 아기를 생각했을 때 아이 아빠가 미국인이면 더 다행인(?) 일이 아닌가?싶었지만 그것은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였고, 아이 엄마인 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아, 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영주하게 될 확률이 생기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어 변호사에게 물어보기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변호사 역시 아이아빠가 미국인이라고 하니 자연스레 내가 아이아빠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싱글맘 스토리를 구구절절 읊기를 굳이 원하지 않아 간단하게만 코멘트하고 말았지만, 문득 이러한 주제에 대해 내 10년 경험에 따라서는 유럽은 매우 리버럴하고, 아직 잘은 모르지만 미국은 오히려 한국만큼 보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미국행 준비도 곧 비자 인터뷰를 앞두며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뱃속 아기도 점점 커져가고, 뱃속 아기가 현재 내 인생 우선순위 1위를 차지하는 중이다. 17주차 중순부터는 뱃속에서 보글!하는 느낌으로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20주차를 지난 현재는 꿀렁꿀렁하는 움직임이 매우 잦고 활발하여 아기의 성격이 극히 활발할 것인지 당황하는 중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아기라... 혼자 상대하기 벅찰테고 남자 어른이 필요할텐데. 조금 얌전한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떤 성격이든 건강하게 태어나고 밝게만 자란다면 장땡 아니겠는가? 내 아기가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은 뒤로 밀어두고, 있는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임신 중기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저번 주에는 출장 겸 한국행도 무사히 다녀왔다. 예전만큼 일에 대해 필사적으로 매달리지는 않게 되는 것이 느껴져서, 업무적으로는 그냥 무사히 쳐냈다는 정도로 지나간 출장이었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 이전보다 더욱 값지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젠 나도 완벽주의적인 워커홀릭에서 벗어나 워라밸을 추구하는 삶에 다다른 것인가?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왠지 득도한 기분이다. 10년 동안 필사적으로 회사일을 했으니 이제는 내 자신과 아기에게 집중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아기와 나에게 선물을 한가득 안겨주며 볼록 나온 내 배에 감탄하며 만져보기도 했는데, 이러한 친밀감이 너무 반가웠다. 자기 말로는 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한 친구는 막상 내 배에 손을 얹으며 아기에게 쉴새없이 말을 거는 것이 너무 고맙고 감동이었다. 짬을 내 만난 부모님과 언니네 가족들도 한아름 아기용품을 선물해주었고, 특히 아이가 셋인 언니는 모아놨던 아기용품들을 한아름 물려주었는데, "네가 임신할 줄 몰라서 쓸만한 건 주변에 다 나눠주고 남은 것들이 너무 조금이라 민망하다"며 상자 두 박스를 내놓았다... 우리 언니 큰 손이었던 것이다. 아기 옷에, 신발에, 여러 용품들에... 가져온 트렁크에 다 넣을 수가 없어서 쿠팡에서 새로 트렁크를 주문하였고 결국 나의 체크인 수하물은 4개가 되었다.

부풀어오르는 배만큼 늘어나는 아기의 짐. 물론 임부복도 몇 개 새로 사고 내 쇼핑도 조금 했지만, 아기 용품들 잔뜩 물려받고 선물받고, 쿠팡에서 역류방지쿠션이다 수유쿠션이다 아기띠다 잔뜩 사다나르며 웃음이 났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친언니 역시 아기 물건 고르는 내가 적응이 안되며 어색하다고 했지만, 임신 전에는 오랜만에 조카들을 만나면 어색하기 그지 없는 로보트이모였는데, 이번에 아기를 갖고 조카들을 만나니 갑자기 호르몬이 달라진 건지 마음 속에서부터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친밀감이 벅차올라오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안아주는 내 모습이 나도 신기하고 놀라웠다. 생물학적으로 설계된 호르몬과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의 한 조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친언니에게 배냇저고리를 선물로 받았고, 배냇저고리는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상징적으로 태어나자마자 입히고픈 예쁘고 소재 좋은 배냇저고리를 독일에 돌아와 한 유기농샵에서 발견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했다. 내 피, 내 뼈로 빚어지는 작은 아기가 건강하고 무사히 세상에 나와 이 옷을 입어주었으면 좋겠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망은 결국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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