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살에 휩쓸려가다가 엉겁결에 서핑 챔피언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
석사 지원하고 공부 시작하기 전까지 잠시 해보지 않겠니 했던 독일 회사에서의 일은, 당시 일이 재미있었다기 보다는,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결국 나는 내가 원하던 1지망 대학원에서 우수 합격통보를 받고도 회사에 남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생이라는 신분과 장학금이 예정되어있던 나의 경제상황은 한국에서 유학준비를 하던 시절 겪었던 무소속의 백수보다는 나았겠지만, 당장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만큼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은 당장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이것이 서민 가정 출신의 자녀들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이다. 당장 눈 앞의 월급을 포기하지 못해 더 큰 발전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 후회를 하자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떠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기반하여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나를 독일에 데려온 파트장은 1년 더 팀에서 경험을 쌓고 주니어 컨설턴트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학원 입학도 포기하고 회사에 남는 것이니 비정규직 인턴/어시스턴트를 1년 더 하는 것은 실망스럽다고 나의 입장을 밝혔는데, 그 파트장은 1년 동안 잘 배워서 컨설턴트가 되면 우리 회사의 주요 업무인 시장분석 컨설팅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니 커리어 방향 설정에 좋은 옵션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당시 나에게는 고용 안정성이 더욱 중요했고, 마침 회사에 독일어를 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전무급 임원이 한국 클라이언트를 담당하는 임원의 어시스트로 업무를 바꾸면 정규직으로 바꿔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고용 안정성이 중요했던 나는 당연히 전무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내가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 디렉터는 감사하게도 너무나 인자하시고 관대하신, 부처님 같은 캐릭터이시기 때문에 이 분 밑에서 어시스트를 시작으로 프로젝트 매니저로 지낸 6년 간 나는 아주 버릇 없이 자라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휴가 내고 싶을 때 내고, 하고 싶은 말 따박따박 하고,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사회초년생 직장생활을 보냈다. 한 번도 혼나거나 까인 적이 없는 직장생활, 상상이 되는가? 내가 하는 일이 단순업무였던 것도 아니고, 연간 50억 유로 상당의 글로벌 레베뉴를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것을 생각하면 나의 사회 초년은 그야말로 베짱이라이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이 적성에 맞고, 잘 했기 때문에 그만큼 일이 쉬웠던 것 같다. 이 때 자기계발을 많이 해놨어야 할 걸, 하는 것이 지금 나의 가장 큰 후회이다.
6년간 그렇게 쉽고 편하게 일을 하다가 아뿔싸,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고 지금 하고있는 업무가 한국지사로 통째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졸지에 나와 나의 보스가 실업자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업무가 공중분해 되는 상황 속에 어리버리하고 있을 무렵, 어쨌든 업무를 이관하려면 경험자가 직접 파견되어 셋업하는 것이 좋으니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나를 한국지사로 파견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을 온몸으로 흠뻑 느끼며,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2년간 엑스팟 파견을 가게 되었다. 당시 보스는 다행히 무탈하게 새로운 업무에 배정되어 보스도 나도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대학원을 포기하고 컨설턴트 트레이닝 대신 키어카운트 매니지먼트 어시스턴트로 회사에 머물기로 한 결정 이후,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떠밀려 엑스팟이 되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물에 빠져 물살에 휩쓸리다가 엉겁결에 파도타기를 즐기게 된 듯한 양상이다.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외부의 영향으로 백오피스 프로젝트 매니저에서 프론트라인 키어카운트매니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