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린 왕자는 그의 사랑에서 우러나온 착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장미를 의심하게 되었다. 별것도 아닌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그는 아주 불행해졌다.
어느 날 어린 왕자는 내게 털어놓았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장미를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향기로웠고, 내 마음을 밝게 해 주었어.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서는 안 됐어! 그 어설픈 거짓말 뒤에 숨은 따뜻한 마음을 눈치챘어야 했어. 꽃들은 정말 모순덩어리야!
하지만 난 어떻게 장미를 사랑해야 하는지 깨우치기엔 너무 어렸어.”
_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모든 갈등의 뿌리는 언어에 있다. 타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면은 외부로 표출되어야 하며, 그 표출의 매개체가 곧 언어이다. 그러나 모든 매개체가 그렇듯이 언어는 불완전하다. 불완전함은 추측과 의심을 피우고, 올바르지 않은 추측과 의심은 갈등을 낳는다. 대부분의 추측과 의심은 올바르지 않다.
로스코 전시회를 보러 미술관에 갔다. 붉은 그림 앞에 두 연인이 서 있었다. 그림에 큰 감명을 받은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말에 짧고 차갑게 대답했다. 분명 남자는 당황하며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연인의 마음이 식은 건가? 내가 잘못한 게 있나? 그저 오늘 피곤한 건가?
아니면 연인은 나와 다른 붉은색을 보고 있는가?
내가 보는 붉은색과 당신이 보는 붉은색이 같냐는 질문은 그 자명함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리만치 대답이 불가능하다. 언어와 감각 사이의 대응은 완전히 사적이다. 당신이 보는 사과의 색은 내가 보는 하늘의 색과 같고, 당신이 보는 하늘의 색은 내가 보는 사과의 색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과는 붉고 하늘은 푸르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단지 ‘붉다’와 ‘푸르다’에 대응시키는 사적 감각이 다를 뿐이다.
물론 나의 붉은색과 당신의 붉은색이 다르다 한들 이것은 매우 하찮은 문제이다. 감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외로움’을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정의하고 ‘쓸쓸하다’를 “외롭고 적적하다”라고 정의하며 ‘적적하다’를 “조용하고 쓸쓸하다”라고 정의한다. 명백한 순환 정의다. 사전적 정의만 가지고서는 외로움이 홀로 있을 때 이는 정서라는 점 이외에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평화로움 또한 조용히 홀로 있을 때 이는 정서이지만 외로움과는 분명 다르다.
결국 외로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자신이 홀로 있었을 때 어떤 정서를 느꼈는지를 떠올림으로써 각자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로움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결론—아니, 분명히 다르다는 결론을 시사한다.
전시회에 가기 전날 남자와 여자는 외로움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는 엇나갈 수밖에 없는 대화였는데, 남자에게 외로움은 평화로움에 닿아 있는 정서이고 여자에게 외로움은 절망에 닿아 있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남자에게 평화로움은 무료함과 닿아 있고 여자에게 평화로움은 충만함과 닿아 있다. 또한 남자에게 절망은 고뇌와 닿아 있고 여자에게 절망은 무기력감과 닿아 있다.
물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언어가 지닌 괴리를 알 턱이 없었기에 외로움을 예찬하는 남자의 말에서 여자가 받은 것이라고는 남자가 상당히 고독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인상뿐이었다. 여자는 언젠가 남자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남자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 감정은 정당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한 것은 남자도 매한가지였다.
라이프니츠는 창문이 없는 모나드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한다. 모든 영혼이 서로 단절된 채 자신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그는 상상력을 애써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의미가 무한 회귀한다는 사실은 의미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 나아가 우리는 모두 이미 서로 다른 모나드—서로 다른 유리 상자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전시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연인은 싸웠다고 한다. 여자가 그 전날 남자의 말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필경 그 둘이 살아온 삶의 차이만큼이나 둘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을 삼키며 집에 돌아온 남자는 몰이해의 가능성이 제거된 순수한 언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단어와 세계가 정합적이고 논리적인 규칙으로 대응을 이루는 언어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완성물을 본 남자는 당황했다. 몰이해를 언어에서 추방하고 나니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 가치가 없는 항진명제와 자연과학의 술어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몰랐겠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해의 여지 없이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는 공허한 논리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언어는 미끄러운 얼음판처럼 마찰이 없을지언정 바로 그 이유에서 걸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마찰이 요청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한 자들에게 만남은 하나의 선언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지 모르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 싶을 만큼 당신의 유리 상자에 나의 장미가 피어나기를 바란다는 선언—그러니 이제 언어라는 조악한 나침반을 들고 당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겠다는 선언이다.
남자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남자는 어린 왕자의 소행성에 있었다. 그곳에서 남자는 저만치 어린 왕자가 장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멈추라고 소리를 쳤다. 어린 왕자가 고개를 들자 남자는 말했다.
“그 장미에게 더이상 말을 걸지 마. 나는 이미 결말을 알아. 그 장미는 너를 오해할 거고, 너는 장미를 오해할 거야. 남는 것은 상처밖에 없어. 상심한 너는 행성을 떠나 사막에서 죽고 말 거야.”
어린 왕자는 움칫거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짓더니, 그래도 좋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너는 사막에서 죽는 것이 좋니?”
“사막에서 죽는 건 싫어.”
어린 왕자는 대답했다.
“하지만 장미를 추억하며 사막에 죽을 수 있다면, 나를 그곳에서 기다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