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보니, 확장 슬롯이 없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의 나는,
마치 새로운 운영체제를 설치하듯
새 각오와 포부를 단단히 다지고 장착했다.
이전의 나는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다.
가정이라는 건 내 인생의 CPU 성능을 분산시키는 백그라운드 프로그램 같았고,
아이를 낳는 건 내 일정표에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러 고난과 번뇌의 터널을 지나
칩셋을 교체하고 시스템을 리셋한 뒤
새로운 인생의 OS를 설치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선택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늘 말했다.
“내 꿈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거야.”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시작의 선언”으로 들었다.
하지만 결혼 후 알게 된 건, 그 말은 “끝의 선언”이었다.
그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고,
그 뒤로는 어떤 업데이트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확장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지만,
그는 공장 초기 세팅 그대로의 모델에서 더 이상 달라지지 않았다.
CPU는 저전력, RAM은 최소 용량,
메인보드는 추가 슬롯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려 하면,
“이건 내 시스템엔 안 맞아.”
업데이트 알림을 보내면,
“지금도 잘 돌아가는데 왜 굳이?"
결국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확장이 가능하지 않은 구형 하드웨어’였다.
내가 더 놀랐던 건
그가 자기 사양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타인의 기기에는 혹독했다.
“그건 왜 이렇게 느리냐?”
“요즘 기술은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시스템의 버그나 과열 문제를 감지하지 못했다.
CPU 온도는 늘 높았고,
팬 소음은 잦았지만
“괜찮아, 원래 이런 거야.”라며 무시했다.
그의 눈에 세상이 단순해 보였던 이유는
그의 해상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표면만 또렷했고,
그 이상의 픽셀은 렌더링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한때 그를 튜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새로운 그래픽카드를 꽂고,
메모리를 확장하고,
구식 부품을 교체하면
언젠가는 빠르고 유연한 시스템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모델이었다.
기본 구조 자체가 닫혀 있었다.
호환 가능한 포트가 없고,
심지어 제조사 매뉴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알겠다.
사람은 디지털 기기가 아니다.
리셋도, 업그레이드도, 부품 교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고치려는 일을 멈추었다.
대신 내 시스템의 안정성을 높이기로 했다.
백업을 자주 하고,
필요 없는 감정 캐시를 지우고,
새로운 버전의 나를 꾸준히 업데이트한다.
그의 구형 시스템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지만,
이제 나는 그와의 연결을
‘로컬 네트워크’가 아니라
‘클라우드 외부접속’ 정도로만 유지한다.
때때로 오류 메시지가 뜨긴 하지만,
이젠 강제 재부팅 대신
그냥 창을 닫고 넘어간다.
그리고 나는 문득 웃는다.
사양은 낮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내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업데이트되지 않는 관계 속에서,
내가 배운 건 내 시스템을 먼저 최적화하는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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