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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덫

금요일, 그들이 처음 말을 건네던 밤

by 가온담


(이솔 · 옵저버)

금요일 저녁의 라운지 바는 유난히 붐볐다.

사람들은 일주일의 피로를 술로 달래고 있었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늘 앉던 자리, 바의 맨 끝 ‘ㄱ’ 자 모퉁이에 있었다.

이곳은 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였다.

조용히 머리를 식히기에 딱 좋았다.


중간쯤, 시안이 있었다.

바 중앙의 의자. 늘 혼자였고, 대화보다는 생각 쪽에 가까운 사람.

잔을 굴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옆자리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하윤이 들어왔다.

늘 단정한 옷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살짝 헝클어진 머리와 편한 셔츠.

'오늘은 진짜 고단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좌석은 이미 만석이었고,

직원이 “바에 자리 하나 남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시안 옆자리에 앉았다.

우연이라기엔 묘한 타이밍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긴 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편하게 앉으세요.”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잔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스피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Jamiroquai의 Virtual Insanity.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윤도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 노래, 오랜만이네요.”

“저도요. 대학 때 즐겨 듣던 곡이에요.”

“그땐 ‘가상의 세상’이란 게 상상 속 이야기였는데……”

“이젠 마음만 먹으면 현실처럼 경험할 수 있죠.”


둘 다 웃었다.

그 웃음은 처음의 경직을 조금 녹였다.


직원이 다가왔다.

“커플 세트로 주문하신 거 맞으시죠?”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닌데요.”

“아… 죄송합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셔서.”

직원이 머쓱하게 물러났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또 한 번의 웃음.

이번엔 둘 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술이 한두 잔 더 들어가자,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시안이 먼저 물었다.

“근무 중일 때와는 많이 다르네요.”

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럼 지금은 벗고 계신 건가요?”

“아마도요.

그래도… 진짜 얼굴이 항상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시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이 습관이 되면,

결국 그게 나를 닳게 만들더라고요.”

하윤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좋은 마음도 너무 자주 쓰면 소진되겠지요.”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관용, 버티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언어다.

한계가 없는 마음은 결국 상처로 새겨진다.’


바의 조명이 낮아지고,

마지막 오더 시간이 다가왔다.

비가 내리는 듯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하윤이 말했다.

“비 오는 소리 같네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은 덜 시끄럽네요.”


그들은 그렇게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받아주는 마음이 끝나는 순간,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들은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겠지.



연재 시리즈 〈마음을 해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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