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까지
가. 유신체제와 250만 호 주택건설계획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한국전쟁의 상처를 딛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주택정책의 제도적 기반을 정비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중 주택건설계획, 해마다 수립하는 주택건설종합계획, 1972년부터 시작된 국토종합개발계획 중의 주택건설계획 등 정부계획 및 법에 근거한 주택공급계획도 발표한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수립한 주택공급계획도 있다. 바로 유신체제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내놓은 250만 호 주택건설 10년 계획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내놓은 전두환 정부의 500만 호 주택건설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부는 위기를 맞이한다. 우선, 1960년대 말의 고도성장이 하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역적자도 늘어나고 외채도 증가하였다. 두 번째는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였다. 1960년대 말 남·북관계는 한국전쟁 이후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더구나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닉슨독트린*을 선언하여 미중수교의 화해모드가 형성되었다.
19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집권기간 내내 학생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주도한 시위에 시달렸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는 박정희 정부에게 위기감을 주었다. 더구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자 집권세력의 위기감은 더 커졌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0월 장기 독재체제인 유신체제를 출범시킨다.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정책이다. 닉슨 독트린은 ‘공중공격이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 당사자들 자신이 저항·저지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선언한 이 원칙은 미국의 재래식 아시아 방위 개념을 전폭 수정한 것으로 1980년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광주대단지사건(廣州大團地事件)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도시빈민 봉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중이 공권력에 저항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경제적(생존)인 문제로 하층민이나 반정부세력이 아닌 시민들이 일으킨, 공권력에 대해 소극적인 저항이 아닌 폭력과 약탈을 동반한 적극적인 저항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다른 유사 사례가 드문 중요한 사건이다. 사건의 명칭 때문에 혼동하기 쉬우나, 이 사건은 광주광역시나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지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성남시의 수정구 및 중원구에 속해 있는데, 이 지역은 사건 당시엔 독립된 시가 아닌 광주군 산하의 성남출장소였기 때문이다. 이후 성남이 광주에서 독립해 시로 승격되었으나, 사건 발생 기준 행정구역 명칭에 따라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일컫는다.
유신 직후 비상국무회의에서 250만 호 주택건설 10개년계획을 발표한다. 이 계획에 따르면 1972년부터~1976년까지 100만 호, 1977년~1981년까지 150만 호를 건설 공급하는 것으로 짜여있다. 250만 호 주택공급계획은 도시빈민의 불만과 저항이 주택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박정희 정부의 도시빈민 유화책이었다.
2. 주요 성과
박정희 정부의 주택정책 중 대표적인 것이 강남 개발과 여의도 개발을 통한 주택공급을 꼽을 수 있다. 강남 개발은 1970년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 시절 남서울개발계획 수립하여 영동 1-2 지구를 시작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1967년 한강종합개발사업 추진으로 공유수면 매립방식으로 다량의 택지를 확보하였다. 당시 조성된 택지를 보면, 동부이촌동 택지 조성, 반포·잠실·압구정 지구 조성, 흑석·서빙고·구의동 택지 등 다량의 택지를 한강 주변에 조성하였다. 여의도 택지도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한강 주변에 조성한 택지에 아파트를 건설하여 1970~1980년대 서울 인구의 상당수를 수용하였다.
가. 500만 호 주택공급정책과 택지개발촉진법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물리적으로 탄압한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는 1980년 8월 집권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주택공급정책을 내놓는다. 이 정책은 도시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1년까지 5백만 호 공공주택 건설 및 택지개발계획안을 수립한다. 주택보급률을 77%에서 90%까지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 계획이었다.
500만 호 주택공급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토지구획정리사업보다 토지의 강제수용이 더욱 쉬운 「택지개발촉진법」*을 도입한다. 그러나 500만 호 주택공급정책은 당시의 경제여건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이 낮은 장밋빛 구상일 뿐이었다. 500만 호 주택공급정책은 몇 차례 계획 수정을 하였지만 결국 달성하지 못한 공염불이 되었다.
나. 온탕과 냉탕을 오갔던 일관성 없는 주택정책
전두환 정부의 침체한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부동산을 경제활성화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대도시 집중은 심각한 주택난을 불러온다. 특히 서울의 주택난은 더욱 심각했다. 경제활성화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500만 호 주택공급계획을 발표하지만, 당시 경제 체력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부는 무소불위의 토지수용법(法)인 「택지개발촉진법」을 제정했고, 이 법에 근거해 개포동, 고덕동, 목동, 상계동 개발을 밀어붙였고, 재임기간 중 176만 호 공급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빈민들인 세입자들의 희생이 엄청나게 컸다.
전두환 정부의 주택정책은 일관성이 부족했다. 1981년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자 양도세 인하, 국민주택 전매기간 단축 주택시장 활성화 정책을 내더니, 1982년 주택시장이 과열되자 분양가상한제, 전매제한, 토지거래 신고제 등 규제책을 발표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주택정책을 낸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경제성장과 소득증가로 주택수요가 폭발했다. 전두환 정부의 주택시장 관리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주택수요 폭발은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 3법 도입 등 급진적인 정책 도입의 배경이 되었다.
* 「택지개발촉진법」은 1980년 정부가 5백만 호 주택건설계획을 추진하며 이를 위한 택지 확보를 목적으로 1980년 12월 입안, 제정되었다. 이를 통해 사업 주체가 대도시 주변 지역에 대규모 토지를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단기간에 신속한 사업추진이 가능해졌다. 과거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소필지 분할 위주의 개발로 고밀도 아파트 단지의 집단적 건설에 불리할 뿐 아니라 토지가격의 상승으로 주택건설 비용 상승의 문제점 때문에 대규모 택지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가. 200만 호 공급정책과 토지공개념 도입 배경
노태우 정부의 주택정책은 200만 호 주택공급정책, 1기 신도기, 토지공개념 3법으로 요약된다.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부동산 규제책인 토지공개념 3법과 1기 신도시 지정과 더불어 공세적으로 공급한 200만 호 주택건설의 도입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러낸 한국은 서울 중심으로 주택가격이 1089년 초부터 폭등하기 시작한다. 우선, 1985년부터 시작한 3저 호황으로 인한 소득 증가와 풍부한 유동성 자금이 자산시장으로 유입되어 주택가격이 폭등하였다.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를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3년 연속 11%(1986년 11.2%, 1987년 12.5%, 1988년 11.9%)이상 시기이다. 둘, 베이비붐 세대들의 본격적인 이촌향도*로 인한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양질의 주택이 얼마나 부족했냐 하면 1980년대 중반 서울시 전체 인구의 13%가 판자촌에 거주할 정도였다.
나. 주요 성과와 한계
노태우 정부의 200만 호 주택건설계획은 주거약자 대상 영구임대주택 25만 가구를 포함해 1992년 임기 내 수도권에 90만 호, 지방 도시에 110만 호 총 200만 호를 짓겠다는 정책이다. 이 계획은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신도시(1기 신도시) 조성해 대규모의 택지를 공급할 수 있어 성과를 거둔다. 1991년 말 기준으로 214만 호 착공하기 조기에 목표를 달성한다.
건국 이래 지난 40년간 건설된 총 800만 호 중 25%가 이 시기에 착공된 물량이었다. 문제점도 있었다. 바닷모래 파동 등 주택 자재난, 건설경기 과열, 미분양 주택 양산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200만 호 주택공급계획과 더불어 토지공개념 3법을 제정하여 부동산 투기 근절 대책을 시행했다. 토지는 사유재인 동시에 공공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공익을 우선하여 토지 소유를 제한 및 적정화하고, 토지거래를 규제하고, 개발이익을 환수하고, 기업의 과다토지 보유를 규제하여 토지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 토지공개념 도입의 취지였다. 노태우 정부는「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토지초과이득세법」이라는 토지공개법 3법을 제정하였고, 1989년 12월 18일에 공포되었다.
그러나 토지공개념 3법 중 「토지초과이득세법」은 헌법재판소에서 1994년 헌법불일치 판결받았다. 헌법불일치의 이유는 “과세대상인 자본이득의 범위를 실현된 소득에 국한할 것인가 혹은 미실현 이득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는, 과세목적ㆍ과세소득의 특성ㆍ과세기술상의 문제 등을 고려하여 판단할 입법정책의 문제일 뿐, 헌법상의 조세개념에 저촉되거나 그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있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92헌바 49 등, 선고 1994-7-29].”에 있었다. ‘미실현 이득에 대한 과세'가 위헌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1999년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은 위헌 결정이 났다. 위헌 결정의 이유는 “소유목적이나 택지의 기능에 따른 예외를 전혀 인정하지 아니한 채 일률적으로 200평으로 소유상한을 제한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어느 누구라도 200평을 초과하는 택지를 취득할 수 없게 한 것은 헌법상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94헌바 37등, 선고 1999-5-29)"했다는 이유였다.
*이촌향도 : 1960~70년대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뒷받침하려면 저임금의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이에 정부는 이촌향도 정책을 추진한다. 이촌향도 정책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농산물가격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하여 농촌인구의 이농을 촉진시키는 정책이었다. 농촌인구의 도시 유입은 산업노동력을 상대적으로 과잉시켜 도시빈민과 하층노동자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냈다.
가. 200만 호 공급 효과로 안정된 주택시장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200만 호 주택공급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주택시장이 임기 내내 역대 정부 중 가장 안정되었다. 대량의 주택공급으로 주택가격 상승세가 꺾이고 가격은 내림세로 돌아섰다. 여기에 1993년 금융실명제*와 토지거래허가제, 부동산 구매 자금출처 조사, 1995년 부동산실명제** 등에 힘입어 주택시장이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나. 국토이용관리법 개정 등 난개발유도
김영삼 정부는 안정된 주택시장을 기반 삼아, 향후 공급부족으로 주택가격이 상승할 것을 대비하여 2기 신도시 계획 등 신속하게 주택을 공급할 수 있는 택지를 정책적으로 미리 확보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 대신 국토의 23%에 달하는 면적을 <준농림지역>으로 지정했다. 준농림지역은 도시계획 절차를 거치면 준도시지역으로 변경할 수 있고, 이는 농촌지역에 고층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지금도 농촌지역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농지 등 주변에 도시계획과 무관해 보이는 <나홀로 아파트>들이 빈번하게 보일 것이다. 이 나홀로 아파트들이 바로 준농림지역을 준도시지역으로 변경해 건설된 것들이다.
*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는 금융 기관에서 금융 거래할 때 가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실명임을 확인한 후에만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긴급명령인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를 통해 1993년 8월 12일에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 부동산은 소유자의 명의로 등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명의신탁을 허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실제와 다르게 등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부동산 투기가 조장되고 탈세, 음성 불로소득이 발생하는 등 경제적, 사회적으로 폐해가 커서 부동산거래의 관행과 제도를 바로잡아 투기의 재현을 방지하고자 1995년 7월 1일 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