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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delion Jul 10. 2023

아빠의 청춘

몇 년 전 오랜만에 친구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친구 딸이 돌일 때 만나고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 돌 때 만났던 그 친구 딸은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학교 끝나고 온 친구 딸과 서로 인사를 했고 엄마 친구라고 소개하는 나에게 친구 딸은 물었다. 언제부터 우리 엄마랑 친구였냐고 난 엄마랑 난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었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친구 딸은 눈이 동그랗게 되어 나에게 질문하였다.

'우리 엄마도 고등학생인 적이 있었어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친구 딸의 질문에 나는 놀랐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어른은 처음부터 어른이었고 본인의 엄마 아빠로 그들을 만났기에 그 이전의 삶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친구 딸의 질문에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날이었다.


나도 아빠 엄마가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을 기회도 많이 없었다. 그 이후 가끔 기회가 될 때 엄마나 아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묻곤 했었다.


최근 동생과 함께 '빠리빵집'이라는 뮤지컬을 봤다. 19살 아들이 우연한 계기로 과거로 돌아가 자신과 동갑인 아빠를 만나게 되면서 현재의 아빠를 이해하는 내용이었다. 이 뮤지컬을 두 번 보았는데 두 번 다 오열하면서 봤다. 보는 내내 아빠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의 울음 버튼을 눌렀던 건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힘들일을 겪기엔 19살 밖에 안되었잖아' 이런 느낌의 대사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난 3년 전 아빠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리곤 아빠가 생각났다.


- 3년 전 아빠와 내가 했던 대화는 아빠가 폐에 있던 아주 작은 암세포를 제거하고 중환자 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난 휴가를 내고 아빠와 함께 하루 밤을 병원에서 함께 보냈었다. 그때는 2020년 코로나로 인한 극심한 통제 상황일 때여서 병원에 보호자가 단 한 명 밖에 상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아빠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 한건 아니고 엄마 대신 내가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자는 것을 자처했었다. 난 커다란 걱정을 안고 중환자실로 갔었는데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걱정스러워하는 나에게 간단한 시술이었고 큰 걱정 안 해도 된다며 안심시켜 주었고 담당 의사 선생님도 암세포가 워낙 작았고 다른 곳으로 전이도 안되어서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셨다. 그렇게 안심하고 일반 병동으로 옮겼고 아빠와 나는 내가 사 온 간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내가 그때 아빠에게 아빠 대학시절에 대해 물었었다. 난 단 한 번도 아빠의 대학시절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냥 그게 궁금했다. 아빠는 힘들었던 대학 시절과 군대이야기를 해 주셨다. 대학 다닐 때 돈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학비가 없어 힘들게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아빠의 얘기를 들으며 '아빠의 20대는 너무도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의 아빠도 힘들었지만 30대의 아빠는 결혼을 하고도 계속 힘들었었다. 아빠에겐 우리 가족 이외에 동생들의 대학학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막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어린 나는 대학생인 삼촌이 우리 집에 왜 사는지 몰랐었으니까...... 아빠가 책임져야 하는 동생들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나는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해 아빠가 많이 미웠었다. 그래서 아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다. 특히 사춘기 때는 아빠랑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었고 모든 힘든 상황의 원인이 아빠라 생각한 적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들을 학비를 아빠가 책임졌지만 그 동생들은 고마워하지 않았었고 그런 동생들을 돌보느라 소홀했던 우리 가족...  다정하지 않은 딸과 고마움을 모르던 동생들 그 사이 어디에서도 아빠는 발을 붙일 곳이 있었을까 싶었다. -


이 뮤지컬을 보며 아들 성우가 부러웠다. 현실로 돌아와서는 어린 아빠가 받았던 고통을 보고 현실의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그에게는 주어졌으니까....  


하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이 이제는 없다. 나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부모님에 대한 소중함 고마움이 있어서 어릴 때와 다르게 잘하려 노력을 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가끔 불쑥 큰딸 보고 싶어 전화했다며 전화했던 아빠에게 바쁘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거나 짜증 냈던 일들 중고등학교 때 아빠와 한 달 동안 말하지 않았던 일들 이 모든 것들이 생각났다.


1년이 지난 지금, 무뎌질 수 있을 꺼라 생각했지만, 아빠의 부재는 날이 갈수록 크게 다가온다.

힘들고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나는 그 일을 서서히 깨우치는 편이라서 인지 지금의 상실감은 작년보다 더욱더 크게 느껴진다.


예전에 강신주 박사의 죽음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죽음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 그중 가장 슬픈 건 '너의 죽음'이라고 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죽음... 막연히 떠올리는 부모님의 부재와 막상 실생활에 닥쳤을 때는 다른 거라고 했다. 그의 누나가 아버지랑 사이가 너무도 안 좋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많이 울었다고 했다. 부재가 크게 느껴질수록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나도 모르게 아빠를 많이 사랑했나 보다. 난 아빠한테 사랑한다 많이 말해드리지 못했다. 참 다정했던 아빠였는데... 별거 아닌 음식을 사드려도 딸이 사준다고 좋아하시며 드시고 아빠가 좋아하는 모카커피라도 사드리는 날에는 비싼 커피 안 먹어도 된다고 하시며 사양하시다 너무 맛있게 드시곤 했는데....


빠리 빵집 뮤지컬을 보며 생각했다.

주린 배를 잡고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로 힘들게 타지에서 대학을 다녔을 아빠에게 빠리빵집 아들 성우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로 잠시나마 힘든 아빠의 마음에 위로를 해드릴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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