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을 나서니 후끈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남아 냄새가 대기를 맴돌다 코안으로 훅 들어온다. 태국에 온 게 실감된다. 공항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카오산로드”. 론리플래닛을 넘기며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창밖을 본다. 유난히 이가 하얀 여자가 활짝 미소 짓고 있는 커다란 광고판, 태양을 가릴 만큼 높다란 빌딩숲, 고가도로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허름한 노점상과 상점들. 처음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익숙한 풍경이다. 민주기념탑이 보인다. 이제 다 왔다. 카오산로드는 방콕 서쪽에 자리 잡은 여행자 거리로 짜오프라야강, 사원, 왕궁, 국립박물관 같은 유명 관광지와 가깝고, 가성비 좋은 숙소와 흥겨운 분위기의 펍, 다양한 액티비티를 제공하는 여행사가 즐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 여행객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공항버스는 국립미술관 앞 버스정류장에 멈춘다. 커다란 배낭을 등에 딱 붙이고, 숙소를 찾아 나선다. 길에는 음식을 파는 노점상, 타투를 해주는 사람,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과 여행객이 얽히고설켜 발 디딜 틈이 없다. 인파를 뚫고 좁은 골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게스트하우스가 보인다. 1인실 팬룸을 만원 남짓한 가격을 주고 체크인을 한다. 메인 거리의 소음과 근처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이 잔잔히 들리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그런데, 맙소사 방에 창문이 없다. 짐을 풀고, 요기도 할 겸 거리로 나선다. 난 노점에서 해물볶음밥과 맥주를 시켜 늦은 저녁을 먹는다. 고수의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어제의 소란스러움이 사그라진 카오산로드를 지나 숑크람사원 뒤편 짜오프라야 강으로 향한다. 사원을 끼고 옆으로 돌아 골목에 들어서면 거리의 다른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밤새 울려 퍼지던 소음과 인파는 사라지고, 거리는 차분하기만 하다. 부지런한 이들은 거리를 청소하고 있고, 노점상 매대 위의 비닐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슬리퍼를 신고 온 누군가가 사고 있다. 탁발을 다녀온 스님과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가 나란히 길을 걸어가고 있다.
강에 도착했다. 물색은 탁하지만 강은 크고 넓다.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아침이지만 햇살이 결코 약하지 않다. 몇몇 사람이 조깅을 하며 옆을 지나가고, 문득 허기가 찾아온다. 마침 근방에 소고기 국수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 그곳으로 향한다. 막 문을 연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그런데, 식당에서 누군가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복장은 영락없는 여자인데, 얼굴과 몸은 남자다. 심지어 턱수염이 꺼뭇꺼뭇하다.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걸까. 낡은 빨간 구두 안 발이 몹시 지저분하고, 얼굴의 화장은 군데군데 뭉개져 있다. 한없이 피곤하고, 슬픈 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그(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거리가 어둑해질 무렵, 구글에서 찾아본 나나역 근처에 있는 클럽을 찾아간다. 이름도 예쁜 이곳 나나는 방콕의 대표적인 유흥가로 역에서 내리면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거리에는 아찔한 복장의 꽤나 어려 보이는 여자, 흑인 여자, 여장을 한 남자,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한결같이 핸드폰을 보고 있지만, 그들의 신경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쏠려 있는 것 같다. 화려한 조명의 클럽 앞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비키니를 입고,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여자들의 표정은 당당하고, 관광객들은 박물관에 온 초등학생 마냥 얌전할 따름이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후덥지근한 밤거리에서 이 풍경을 맞닿뜨리자 프랭크 밀러의 씬시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게 붉은색으로 바싹 달궈진 거리를 지나 클럽에 도착했다. 와인바 겸 클럽인 이곳은 밖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재즈풍의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난 그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몇 시간 동안 플로어와 바를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거리에 나선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간 걸까. 사람들이 한결 줄어있고, 대신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숯불향이 가득한 꼬치, 얼음 위에 올려진 수박과 파인애플, 돌절구로 직접 만드는 쏨땀, 연유가 듬뿍 뿌려진 바나나 로티,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팟타이, 고명이 많이 올려진 쌀국수. 난, 게걸스럽게 모든 노점상을 돌며 하나하나 다 먹어본다. 배가 터질 듯이 부르지만, 식욕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