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서대문구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신촌 번화가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고, 중학교는 연희동 집에서 꽤 멀어서 학교가 있는 아현동까지 버스로 통학을 했다. 고등학교는 이대 후문, 대현동에 있었고, 대학은 신촌에서 마포 쪽으로 가는 길, 노고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니던 학교가 모두 번화가에 있어서일까 동창, 동문들이 술집이나 카페를 왕왕 차리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은 다니던 초등학교 지척에 술집을 차렸었고, 고등학교 선배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락카페를 열었고, 대학 선배 중 한 명은 큰 규모의 비어펍을 신촌 메인거리에서 운영했었다. 덕분에 호주머니가 가벼워도 동창들의 가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재미있게 잘 놀 수 있었다.
그 당시 신촌은 지금의 홍대보다 더 번화한 곳이었다. 그레이스백화점에서 이름이 바뀐 현대백화점 주변과 연대 앞에서 신촌 전철역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제일 번화했고, 그 뒤쪽에 어지럽게 이어진 작은 골목에는 술집과 상점, 락카페, 식당이 빼곡했다. 신촌에서 이어지는 번화가는 이대입구까지 연결되었는데, 그 길 한쪽에는 모텔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대 앞에는 옷가게, 큰 규모의 미용실, 분식점,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촌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장소는 연대 정문에서 신촌로터리로 이어지는 메인 거리에 있었던 대형 오락실이다. 중학교 때 “스트리트파이터2”란 격투게임이 한참 인기 있을 때인데, 아케이드 게임기 종류도 많았고, 고수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기에 난 몇 주 동안 용돈을 모아 집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던 그 오락실로 원정을 갔다. 독수리다방 바로 앞에 있던 대형 오락실은 스트리트파이터 고수들의 경연장이었고, 그곳에서 지하철 역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조이월드’란 체험형 게임기가 많았던 오락실이 있었다. 토요일 오전 학교 수업을 마치면, 난 친구들과 우르르 신촌으로 몰려갔다. 분식점에서 라면 한 그릇씩 먹고, 대학생 형, 누나들로 생기가 넘치는 신촌 거리를 기웃거렸다. 오락실에서 고수들의 현란한 플레이에 감탄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집에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고, 우리 아들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반기시던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기억난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신촌의 기억은 바로 “롤링스톤스”란 라이브클럽과 “해열제”란 락카페이다. 홍대와 마찬가지로 신촌 역시 특색 있는 클럽과 술집이 즐비했는데, 그중 롤링스톤스는 인디밴드들의 공연이 자주 열리던 장소였다. 대학 때 중간고사를 마친날인 것 같다. 어떻게 알고, 나와 친구들은 롤링스톤스에 윤도현 밴드의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리로 몰려갔다. 지하에 자리 잡은 클럽은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그날 수학과 화학 시험이 있었나? 대학 교재로 돌덩이같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우리는 객석 뒤편에 자리 잡았다. 윤도현 밴드가 “한국락 다시 부르기”란 앨범을 낸 직후의 공연이었는데, 공연이 어찌나 신나던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방방 뛰고, 소리 지르며 공연을 즐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해열제는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많은 클럽 중 독특한 컨셉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분장을 해주었기 때문인데, 그냥 대충 하는 분장이 아니라, 빌려 입을 수 있는 코스튬 복장도 다양했고, 실감 나는 분장을 해주는 직원까지 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난 롱원피스를 입은 여자, 친구 녀석은 스타워즈의 시스, 다른 녀석은 마당쇠 분장을 했다. 분장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본모습을 더 드러냈다. 스테이지를 점령한 우리는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노래하며 신촌의 화려한 밤을 지새웠다.
지금은 안타까울 정도로 황량해진 이대 입구는 근방에서 새로운 프랜차이즈가 제일 먼저 들어서는 힙한 장소였다. 정신없이 먹다 보면 머리가 띵해지는 빅걸프를 팔던 세븐일레븐도 이대에 먼저 생겼고,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어린 여동생과 같이 손잡고 가서 먹었던 베스킨라빈슨은 물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스타벅스도 이대 앞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노래방도 이대 앞에서 먼저 생겼었는데, 그때 노래방에서 처음으로 불렀던 이승환의 노래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만큼 이대 입구는 시대의 트렌드를 제일 먼저 반영하고, 유행을 선도하던 곳이었다. 나름 멋을 좀 부리고 싶을 때는 이대입구에서 옷을 사 많이 다녔는데, 떡볶이를 주문하면 푸짐한 어묵을 서비스로 주던 민주떡볶이, 칡냉면이 맛있던 율촌, 돌솥비빔밥을 처음 먹었던 미리내, 만두탕수육이 유명했던 선다래가 기억난다. 신촌에서 이대로 이어지는 곳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모델촌에 대한 추억도 많은데 이 이야기는 내 일기장에만 조용히 남겨둘까 한다.
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이 근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거리 곳곳, 골목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고, 나의 작은 흔적과 기억의 부스러기가 곳곳에 떨어져 있다. 내가 기억하는 활기차고 화려한 거리는 서서히 바래져 가는 기억처럼 무채색의 심심한 곳으로 변했지만, 가끔 일상에 지치고, 일에 치이면 신촌에 간다. 여전히 젊은이들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고, 다니던 교정도 가본다. 이제 50에 가까워진 중년의 남자는 책가방을 메고, 신촌의 초등학교로 등교하던 초등학생이 되고, 오락실에서 신나게 게임을 즐기던 중학생이 되고, 신촌의 락카페에서 밤을 지새우던 대학생이 된다. 과거의 나로 갈 수는 없겠지만, 이곳이 전처럼 활기차고 특색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작지 않은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