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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Oct 29. 2022

[09] 행복은 수리 중

 하루는 어색하게나마 흘러갔다. 가끔은 나를 두고 혼자 흘러가는 것 같아서 야속했고, 가끔은 오랜 시간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이서 부담스러웠다. 하루는 나를 곤란하게 했다. 항상 몸이 멀쩡한 날에는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고, 몸이 멀쩡하지 않은 날에는 몸이 멀쩡해지기만을 기다렸다. 몸이 멀쩡한데 바쁘지 않은 나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작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엿보았다. 무슨 기분을 느꼈더라. 화면을 끄면 전부 다 잊어버렸다. 그렇게 또 한 번 많은 감정들이 나를 스쳐갔으나 내 곁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게 또 싫어서 그만두었다. 영화를 보기도 했다. 애인의 다리에 머리를 두고 누운 채 나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장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와 관계가 없었고, 정말로 어떠한 관계도 맺어주지 않았다. 쉬라는 말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쉬려고 했던 것 같다. 전에는 힐링 리스트를 한 스무 개 정도 만든 것 같은데,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애인이 다른 사람은 이렇게 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쉼과 나의 쉼은 다른 걸까. 나의 쉼이 뭔지 모르겠다고 꽤 오랫동안 생각했다. 분명 쉬고 있는데 우울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고, 그 우울이 싫어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분명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좋을 것 같았는데 새삼 증명받았다. 세상은 어딜 가던 똑같을 거야. 어렸을 땐 여행을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니 좋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있는 곳이 끝이 아닐 거야, 라는 기대를 품고 여행을 떠났지만 전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어느 새부터 사진만 찍었다. 인증을 해야 하니까 찰칵. 그래도 사진 속에 있는 나는 꽤 좋았다. 그럼 행복한 기억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행을 매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여행이 쉼이 되질 것이라 여겼으나 여행을 가면 갈수록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줄어들고 세상이 다 똑같아 보였다. 역시 도망으로 하는 쉼은 나의 쉼이 아닌가 봐. 그렇게 중얼거리면 외로워졌다. 나의 것이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서 하염없이 나의 외로움을 곱씹어보았다.


 하루는 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추스른다는 게 뭔지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이라 이런 내 모습이 꽤나 쓸모없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잠깐 기분 좋고 끝날 일. 만성적인 우울감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고, 이겨내기엔 내가 무력했다. 그런 내 모습에 애인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가 시작되면 밥을 먹었고, 가끔씩 다른 곳으로 나갔으며 할 일이 없어 또다시 핸드폰을 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피로해져 애인의 몸에 기대는 일이 많아졌다. 이대로 집에 갇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 탈진감을 너무 사랑했다.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들이 나를 살릴 거라고 믿으며 사랑해왔다. 이제는 방랑자가 되어버렸네.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하는지도 모른 채 부유하고 있네. 재미가 없다. 이건 너무 만성적인 무기력증에 가깝다. 쉰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한 번아웃의 굴레에 갇혀있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모른 척 달리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다시 경주에 오르면 열기가 있었고, 미약한 흥분감에 사는 게 느껴졌다. 이것도 중독이다. 생각을 끊어내느라 바쁜 하루가 이어졌다.


 하루는 햇빛이 드는 창가 자리에 애인과 함께 앉아 글을 쓰다 책을 읽다가 글을 썼다. 오랜 커플이 그렇듯 우리는 대화 없이 조용히 각자 할 일을 했다. 햇빛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잠시 평화롭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조용하고, 무감한 하루였지만 달달한 밀크티를 마시며 풍경을 보자 이런 걸 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기력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많은 게 바뀌었다. 안정적이진 않지만 금전적인 문제가 대부분 해결되었고, 나를 괴롭히는 가족들도 없었다. 조용하고 무감한 하루. 그렇다면 평화로운 하루였던 게 아닐까. 밀크티를 마시며 애인을 돌아보았다. 눈을 내리깐 채 책을 읽는 애인을 보자 짓눌린 죄책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때 동안 애인은 뭘 했더라. 계속 옆에 있어주었다. 손을 잡아준 채 내게 계속 쉬라고 말했다. 역시 이래서 사랑이 싫었다.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게 그토록 싫었는데 나는 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버렸다. 이런 건 이제 싫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애인을 향해 말했다. 이제 좀 내 취향이 뭔지 알 것 같아. 집보단 밖이 좋고, 마냥 노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걸 하는 게 좋아. 기왕이면 카페에서 일을 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이게 내 쉼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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