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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Oct 30. 2022

[11] 어른 아이

 100만 원을 들고 집을 나온 스무 살에겐 아직 어른이 필요했다.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 매일 밤 다른 친구들과 놀면서 밖을 나돌아다니던 열여덟 살에게도 어른이 필요했다. 다리가 시커멓게 물들 때까지 맞았던 열네 살에게도 어른이 필요했다. 원망은 쓸모가 없었고, 그 무엇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믿음 밑에 깔린 방치와 훈육으로 감싸진 폭력 속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인이 되면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성인이 된 후엔 돈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 여겼다. 실은 여전히 모르겠다. 무엇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구원은 없다고 믿으면서도 결국엔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창피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러다 사랑 또한 나를 배신하면 나는 또 있을 곳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너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쉽사리 믿을 수가 없다. 사랑은 이별로 끝이 나고, 사랑 또한 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나는 또 어디로 흘러가 버릴까. 구원을 믿지 않으면 되지만 그런 믿음조차 없으면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나는 또 모르겠다.


 일단은 지금을 생각한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손목 위로 자기 머리를 기대는 우리 집 고양이를 떠올리고, 소파에 몸을 기대면 몸을 겹치고 누워 같이 먹을 것을 찾아보는 너를 머릿속에 그린다. 하루는 가끔 아깝고,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또 일상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그럴 때면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생각한다. 처음 집을 나갔을 땐 두 손바닥으로 다 가릴 수 있을 것 같은 고시텔 창문이었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린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


 이제 나는 어른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을 바라고, 스무 살 때처럼 내가 원하는 어른이 내가 되길 바란다. 스무 살의 나는 내가 원하던 어른의 탈을 내가 뒤집어쓰고 싶었다. 책임감 있고, 누구든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갑작스레 어른이 되고 싶었던 탓일까. 그만큼 나는 빨리 지쳐갔고, 몸이 깎여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다면 적어도 내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결국엔 또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숨이 막혀도 되지 않을까.


 내 사랑은 결국엔 책임감이라 너를 지키고 싶다는 종종 했지만 네 상처는 결국 내가 되었다. 나를 잘 몰랐던 탓이었다. 나는 힘들면 힘들수록 너를 버리고 끝내 나를 버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몇 번의 위기를 겪었고, 내 무리가 너를 흔들었지. 이게 내가 원하던 어른의 모습이었을까. 쉽게 무리해버리고는 지켜야 할 사람을 흔들어버리는 게.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보호였지, 흔들림이 아니었는데.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잔잔하게 깔린 우울과 불안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일까. 내가 더 빨리 달릴수록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다. 맹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나는 늘 고민 속에서 헤엄친다. 그만 생각해. 생각이 너무 긴 것은 좋지 않아. 불안과 생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해. 되뇌고 되뇌던 말들.


 가끔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한다.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나를 떠올린다. 불안에 쫓겨 제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아이를 눈앞에 그려낸다. 불행했었나. 내게 너무했었나. 그렇지. 내가 내게 너무 했던 것은 맞지. 이제는 무작정 어른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당시의 나는 어렸고, 그만큼 약했는데 그런 것들을 외면한 채 가혹하게만 굴다니. 내가 바라던 어른. 그런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슬프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었다니. 조금은 씁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존재하는 매일을 슬퍼하던 어린 시절의 나.


 나의 번아웃과 당신의 번아웃은 다르겠죠. 나의 사막과 당신의 늪, 혹은 당신의 숲, 당신의 무언가가 다르듯이. 우리는 아마 다른 이유로 번아웃을 겪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몰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과도한 열정에 압도당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테고,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번아웃의 굴레를 돌고 돌면서 잔잔하게 깔린 불안과 공포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 밑에 내 트라우마가 있는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를 생각할수록 과거의 내가 나왔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원하던 모습을 마주하자 번아웃 당시의 내가 보였다.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실체를 마주하자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움켜쥐고 있던 손을 드디어 폈다. 손안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까맣게 칠해진 그날의 밤과 내 등을 떠밀던 그 손은 무엇이었을까. 끝내 마주한 시작점은 모두가 다르겠지요. 노력이 끝내 나를 구해주진 못했죠. 행복해질 것이란 믿음이 나를 도와주진 못했죠.


 그래도 괜찮겠죠. 나는 또 숨을 잔뜩 내뱉기도 하고 들이마시기도 하며 달릴 거고, 숨이 차는 날에는 잠시 몸을 숙이고서 숨을 정리하며 쉬기도 할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알게 되겠죠. 어떻게 뛰는 게 나한테 가장 잘 맞는 지요.


  노력하면 행복해지나요? 네, 저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행복해졌나요? 아직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더 노력하진 않으려고요. 노력이 나를 구해주진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엇보다 그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어요.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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