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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Nov 19. 2022

무의미에서 너까지

 올림머리가 좋다고 해서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그 애는 나를 보면서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순진해서 어떻게 살래. 그 애의 눈에 비친 나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나는 즐거웠고, 그 애는 자신의 이상형을 따라 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 애와의 이별은 당연했다. 안녕, 하고 만나서 안녕, 하고 헤어지기. 그게 당연한 이치 아닐까. 자연스레 그 애한테 오는 연락이 줄어들었고, 나는 첫 연애를 했으니까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사람들이 내게 묻곤 했다. 정말로 괜찮아? 응,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더라도 상관없었다. 상대에게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내가 그 모습을 따라 하는 것. 그런 기만적인 연애가 좋았다. 어차피 너도 꼭 나일 필요는 없잖아? 그냥 혼자가 싫은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우리 그냥 즐겁게 놀자. 그게 나의 연애였다.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내 스무 살은 나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 끊긴 지원과 하루가 멀다고 나가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먼지가 가득한 고시텔.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음에도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즐거움에 온몸을 맡겼다. 자극을 위해선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캘린더를 빼곡하게 채우며 약속을 잡았고,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이름조차 묻지 않은 채 놀던 날들을 이어갔다. 이리저리 부유하듯이 온갖 인맥을 타고 돌며 사람을 만났다. 그래야 내가 웃는 얼굴로 있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면 정말 즐거운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사실 나를 지우고 싶었다.


  너는 처음부터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건 내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았다. 우리의 첫 만남은 개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삭막했고, 당시의 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너는 무죄가 맞았지만 내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고까운 표정으로 너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그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되려 나에 대한 인상을 1도 남기지 않았으며 무심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무것도 그려내지 않았다. 네 앞에 있자면 나는 어쩐지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너한테 찾아가곤 했다. 무심한 표정, 마주치지 않는 시선, 없다시피 한 나에 대한 생각. 나는 그런 것들을 편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너한테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돌린 결과 너는 나한테 어떤 관심도 없을 것이라 여겨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가 보여주고 싶은 면밖에 보지 못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잖아. 그렇다면 A가 나한테 A1의 모습만 보여 준다면 내게 있어 A는 그저 A1이 아닐까. 우리가 온전한 A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기만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A1은 내게 새롭게 정의된 B가 될 거고, 나는 점점 B를 곱씹다 씹어보다가 그 모습이 어느새 C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국 C가 아닐까. 우리는 C를 보며 A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동시에 타인에게 내 모습 그대로 드러낼 각오조차 되지 않은 겁쟁이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내 말에 동조하길 원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홀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겨질까 봐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래, 이 말은 결국 길고 긴 나의 변명이었다. 내가 A1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해 내가 아닌 결국 C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업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 나름의 결심이었다.


  그랬기에 술 먹고 키스한 그날 역시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너를 너무 쉽게 대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했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나고 나서 떠올려보면 짐작이 가는 것들은 참 많았지만, 그런데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미안하지만 하나였다. 내게 있어 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놈은 결국 나 혼자였음을 몰랐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별거 없었다. 내가 정신을 덜 차려서였다. 너는 네 전 애인과의 이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분간 비밀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 백일. 백일 정도 겨우 갈 연애. 그렇게 보였다.


 그건 전부 내가 사랑받은 적이 없는 인간이라 그랬다. 내 나름의 변명을 또 구질구질하게 해보자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가정에서 마저 게임에 밀려 방치당하다시피 자라서 그랬다. 사랑이란 단어를 들을 수 있을 때라고는 두들겨 맞은 다음 날 타인의 말을 빌려 듣는 부모님의 변명이 전부였다. 나는 사랑을 몰랐고,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와 달리 너는 참 내게 열심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내 옆에 있어 주었고, 도망치고 숨어버리는 날에는 어떻게든 찾겠다며 온 동네를 뒤집고 다녔다. 나였으면 정말 끝내고 말았을 문제였는데 너는 고작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버텼다.


 굳이. 이렇게까지 연애를 해야 하는 걸까. 잠들 수 없는 수많은 밤을 흘려보내며 나는 늘 생각했다. 네가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 희생에서 뭘 얻을 수 있는지, 급기야 짜증에 못 이겨 인신공격까지 하는 나인데, 왜 사과 한마디에 화를 풀고 마는지. 내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네가 사과했으니까 용서할게, 를 너한테서 처음 들어보았다. 정말로 너는 내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하던가, 먼저 공격하던가. 내 세상의 유일한 선택권이었는데 그 공식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내가 너무 멍청한 인간이라서. 그제야 세상의 공식이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믿으면 나는 피식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피식자가 된 너는 불행해지는 걸까. 내가 본 너는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태평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기적으로 굴만큼 굴어서야 눈에 들어온 장면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너를 사랑하기로, 내 선 안에 너를 초대하기로 한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사랑이란 단어는 내게 너무 이질적인 것이었다. 몇 번이나 사랑에 대해 알려고 시도했다. 가족애, 우정, 그 밖의 다양한 의미들. 화목한 가정을 꾸며내고 싶어서 웃었고, 멀쩡한 인간처럼 보이고 싶어서 사람들 속에 있었다. 결국엔 무의미였다. 피상적인 관계는 결국 끝까지 피상적으로 남아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아무도 없었던 그런 나였다. 너와 있으면서도 나는 계속 죽고 싶어 했다. 내가 너무나 아픈 사람이라 그랬다. 너로 치유하기엔 내가 여태까지 겪은 상처들이 많았기에 미안하지만, 너로는 부족했다.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다시 또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가족들이 나를 또 버리고.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너마저 나를 거절한다면 나는 정말로 버틸 자신이 없어서 그 전에 죽고 싶었다. 굳이. 굳이 내가 살아야 할까? 굳이, 라는 단어 앞에서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어갔다. 그래, 굳이 내가 해야 할 것들은 없었다. 하지만 너는 달랐다. 너는 슬퍼서는 안 됐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원치 않은 고통을 잔뜩 끌어안고 사는 애인데 애인의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굳이 추가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애인이 아니라 전 애인이면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다. 문제는 실시간으로 너에게 상황을 보고하던 시점이었고, 입을 다물어버리자 너는 쉽게 눈치채버렸다. 그래서 그다음 날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신병원에 있는 내내 너는 쉬지 않고 내 상태를 눈여겨보았다. 나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은 일들을 너는 아주 당연하단 듯이 해냈다. 코로나로 만나지도 못하는데 왕복 2시간 걸리는 병원에 간식까지 넣어주며 온갖 성의를 보였다. 나는 그런 너의 최선을 지켜보았다. 예전이라면 금방 끝나겠지, 하는 의심도 이젠 일어나지 않는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이 모든 것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굳이 살 이유는 없지만 네가 슬픈 건 또 싫었다. 그래서 그냥 죽는 것을 보류로 남긴 채 병원을 나왔다. 고작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돌아온 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말을 하는 게, 웃는 게, 삶을 사려고 하는 것들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전부 포기한 채 정신을 놓고 있는 게 너무나 익숙해진 탓이었다. 네 옆에 있으면서 나는 쭉 가늠했다. 죽을까 살까. 하지만 잠든 너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불쌍하고 서글퍼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쟤는 하필 나를 사랑해서 이런 고통을 안고 가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어차피 그런 것들은 한둘이 아니기에 그냥 무시해버렸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밖의 것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만 나 자체가 소중하진 않다. 그건 그냥 취미와 같은 것들이라 의미가 없어서 사랑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사랑은 아마 네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너야말로 내 첫사랑이 아닐까. 정말로 네가 첫 연애는 아니지만 내가 처음으로 한 사랑은 맞으니까. 이제는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게 이만한 사랑을 주지 않았을 테지. 모든 것이 무의미로 가득한 세계에서 나는 너만 신경 썼다. 그래 너는 슬퍼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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