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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28. 2022

극부부도 #13. 남편을 주부로 만드는 방법

아내가 프랑스 궁중 대화법을 깨우쳤다


1.


“말해보거라”

“그저 새 프랑스 국왕에 대한 제 견해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남성으로서의 힘은 빈약하더군요.”

“계속 말하게.”

“그의 옹졸함은 경악할 정도입니다. 가벼운 모욕에도 큰 원한을 품죠. 발톱을 달고 있는 어린 짐승과 같습니다. 억울함으로 분통해하고 잊거나 용서할 줄 모르죠. 위대한 왕, 위대한 남자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남자에 대해 그대가 뭘 알겠는가?”

“그런 사람이 제 앞에 있을 때 알아볼 수 있도록 많은 책을 읽고 충분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럼 주변을 둘러보게. 궁금하군. 이 자리에도 있는가?”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폐하. 바로 그곳에 계시군요.”

(좌중 웃음, 흐뭇한 왕)

“용서가 남자를 위대하게 만든다고 했지. 다른 건 뭐가 있나?”

“관대함, 겸손, 자신의 맞수를 알아보고 그에 위협당하지 않을 능력입니다.”

“같은 남자끼리 말인가?”

“여자도 가능하죠.”

“그런가? 여자가 남자에게 대적할 수 있다고?”

“여자들도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합니다만 남자에게 중대한 것을 양보하니 서로 동등하다고 인정할 수 있죠.”

“대단히 많이 변했군, 앤”

“제 기도가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궁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영광입니다.” (출처: 넷플릭스 ‘천일의 스캔들’)



영화 ‘천일의 스캔들’(원제 ‘The other Boleyn girl’)의 한 장면이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8세의 정실을 몰아내고 여왕이 돼, 엘리자베스 1세를 낳게 되는 앤 볼린이 프랑스에서 돌아와 처음 리처드 8세의 눈에 띄는 장면.


프랑스 궁중 예절을 배웠다는 앤 여왕의 이 짧은 대화법에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지가 담겨 있다.


앤 볼린은 이미 한 차례 리처드 8세와의 만남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왕을 낙마시키는 죄를 지으며 눈밖에 난 전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로 인해 다시 리처드 8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위와 같은 대화법을 사용한다.


(1) 동등 혹은 경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대상을 예로 들어 관심을 환기한다

(2) 그 대상에 대해 평가하며, 자신이 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인지시킨다

(3) 평가 기준을 언급한 뒤, 그 평가 기준에 부합한 인물로 대화 상대를 부각한다

(4) 대화 상대로 하여금 평가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어떠한 행위(용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다

(5) 자신이 상대와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해 하찮은 시간 낭비가 아니었음을 주지한다


더 단순화하자면 이렇다


관심 환기 - 판단 - 행동 유도


여기서 핵심은 리처드 8세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 건드리는 것이다. 리처드 8세의 경우는 오만함과 자존심,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경쟁심리였으리라.


앤은 리처드 8세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인 새 프랑스 왕 얘기를 꺼내 관심을 갖게 만든다. 그런 뒤, 옹졸함과 관대함의 상반된 가치를 비교해주고 마땅히 왕의 관용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낙마 사건과 관련한 단 한마디 사과 없이 그녀의 재치와 매력을 이용해 얻어낸 것이다.


무릎을 탁 칠만한 수준이었다.


일단 잘못하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역사적 사실과 픽션이 뒤섞인 작품에서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형태였을 테니 일반적으론 실생활에서 응용하기란 쉽지 않을 게다.



2.


“아하하하, 이것 좀 봐.” (관심 유도)


아내가 무슨 글을 읽고는 깔깔대며 나한테 말한다.

짤방 섞인 글귀이다.

대충 그린 그림에 눈빛만 진지한 남성 얼굴, 그리고 궁서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널 위해 죽을 순 있는데, 설거지는 니가 해’ (비판의 대상)


“왠지 공감되네. 극한 상황에서 내 목숨을 희생할 만큼 사랑하지만, 실은 작은 희생을 하기도 어려운 거다 이거군.”

“모순, 모순”

“음.. 모순되지 않은 사랑을 한다면, 작은 희생부터라… 난 설거지 그래도 자주 해주지 않나?”

“뭐? ‘해주는’ 거? 설거지는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니가 형편될 때 도와준다는 의미인가?”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건 아니지. 나도, 너도 일하니까… 그렇지 뭐. 같이 해야 하는 거지, 동등하게… 식기세척기가 소음이 좀 있던데…” (가치 판단)


아내는 며칠 뒤에 수세미 하나를 사다 놓곤 말한다.


“이게 양면이 재질이 달라서 설거지하기에 좋다고 그러더라고.”

“어디 한번 해보자.”



설거지를 하다 보면 수세미가 보통 구겨지는 일이 많아 짜증을 유발한다.

모양이 잘 유지되는 수세미, 너무 크지 않고 손에 잘 맞게끔 디자인이 된 좋은 수세미는 다시 펴서 모양을 잡느라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하지 않게 하니 설거지를 용이하게 만든다.


이런 수세미라면, 설거지가 조금은 쉽겠는걸? 좋은 디자인이군. 나는 그 수세미 하나에 감탄했다. (행동 유도)



3.


“우오오옷!!! 청소기에서 레이저가 나온대!!!!”


작년 언젠가, 한 청소기 회사에서 레이저를 쏴서 미세먼지까지 모조리 디텍트하는 제품을 출시했다.

국내에는 출시하지도 않은 청소기를 아내가 어디서 보더니 괜찮지 않냐며 보여준다.


전자제품 얼리어답터 기질을 가진 나로선 지나칠 수가 없었다. (관심 유도)


던져 놓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아내.


나는 이 제품이 우리 집에 아직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는 청소기와 비교해 무엇이 좋은지 하나하나 가성비를 따져가며 고민했다.


‘이놈의 미세먼지, 권력자들마다 지들이 무슨 수로 미세먼지를 잡아낸다는 건지 주구장창 미세먼지 공약들은 남발했는데, 정부가 디젤차에는 미세먼지 저감장치도 달게 하고, 노후 디젤차는 다니지도 못하게 통행을 금지시켰는데도, 중국에서 겨울에 난방 좀 하면 곧바로 우리나라로 미세먼지가 날아와서 이제 더 이상 제주도도 청정지역이 아니라는데 대체 서울은 미세먼지의 도가니인가, 이것 때문에 몇 년 전에 공기청정기도 샀는데, 그걸로도 부족한 것 같아 공기청정기만 지금 집에 몇 개인가, 애들 방까지 4개가 있나, 그런데 공기청정기 있으면 미세먼지를 안 들이마시는 건가, 사기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냥 청소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청소는 제아무리 안드로메다 우주 괴수급 흡입력을 가진 놈으로 열심히 해도, 물청소하지 않으면 마룻바닥에 붙어버린 고대괴수 같은 미세먼지 놈들은 빨아들이지 못할 테고, 물청소라고 할지라도 섭씨 100도로 증기 팍팍 쏴대는 스팀청소를 하지 않는다면 마치 40년째 내 허벅지와 엉덩이 어딘가, 혹은 복부 어딘가에 살고 있는 지방 덩어리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텐데, 과연 이 레이저가 갖는 의미는…???’


그렇다. 먼지를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거구나. 레이저를 통해 먼지를 눈으로 보면 청소하기가 용이하지, 보이는 먼지를 때려잡는 거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전환. 이건 사야 돼. (판단)


국내 출시도 안 된 청소기를 직구한 뒤 사용한 지 어언 6, 7개월째?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저녁에 한 번, 재택을 하거나 집에서 쉬는 날이면 시도 때도 없이 청소를 하고 있다. 그냥 청소기는 내 영혼의 동반자. (행동 유도)



도저히 레이저가 쏴서 보여주는 먼지 부스러기들을 빨아들이지 않고선 참을 수 없는 수준이다. 레이저에 먼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닥을 조지다 보면 상쾌함으로 포장된 승리감에 도취된다.



4.


아내가 뭔가를 보고 있다. 뭘 그렇게 보냐고 물으니 유튜브란다.


뭔데? 응, 청소 유튜버.


“네, 이 제품은 말이죠! 이렇게 물을 넣고 기다렸다가 끓으면 이렇게 버튼만 누르면 추와아아아아아아아”


아내가 소리를 키웠는지, 이제 소리가 나한테도 들린다.


자꾸 귀가 간다. 어느덧 아내 옆에 가서 앉아서 나도 보고 있다.


“야 그냥 사자 사!”



결국 스팀 뿜는 청소기 비스무레한 것도 사서 사흘에 한 번 꼴로 물청소도 하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


내숭인지 음흉인지, 이 여자가 나를 주부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이었음을…


용도에 맞게 잘 디자인된 제품에 환장하는 나의 성향과 얼리어답터 기질, 깔끔한 성격을 이용해 나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것이구나!



5.


집에 반찬을 갖다 주러 오신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 요즘 애들이 방학인데도 바빠서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다는 말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요리를 좀 해봐라. 유튜브도 잘 돼 있어서 그거 보고 요즘 남자들이 요리도 많이 한다는데”

“아, 그것만큼은 안 돼! 요리까진 절대 안 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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