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니라
연극 <햄릿>을 보고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햄릿>을 보고 왔다.
익히 알고 있던 명대사들이 쏟아졌다.
많은 고전이 그렇듯 '알고' 있었을 뿐 이제껏
제대로 '감상'한 적은 없던 작품이다.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 덕분에
이제야 400년 전 셰익스피어의 숨결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니라.
Fraility, thy name is woman!
불과 한 달, 불쌍한 내 아버지의 시신을 따라가던
그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니오베처럼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녀가, 왜 그녀가.
오, 신이시여!
하찮은 짐승도 더 오래 슬퍼했을 거 늘,
내 삼촌과 결혼을 하다니!
(중략)
벌겋게 퉁퉁 부은 눈에서 흘러내린 가식적인
눈물의 소금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결혼을 하다니
아, 사악할 정도로 빠르구나.
근친상간의 잠자리로 그토록 빨리 달려가다니!
<햄릿>의 비극의 시작은 어머니인 왕비
거트루드의 변절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만 끝이 났다면
햄릿 왕자의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왕이 된 숙부의 품에 안겨버린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의 부재는 도저히 희미해질 수가 없다.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해질 뿐이다.
거트루드는 어쩌자고 시동생과 결혼했을까?
원작에는 그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1. 정치적 안정과 생존
선왕의 죽음 이후 정치적 혼란이나 자칫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권력 공백이 원인 일 수 있다. 거트루드는 시동생 클로디 우스와 결혼함으로써 왕국의 미래를 보장하고 왕비로서의 자신의 지위도 유지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아들인 햄릿을 보호하는 방도였을지도.
2. 시동생 클로디우스의 조종
클로디우 스는 교활하고 교묘한 인물로,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형수이자 왕비인 거트루드에게 결혼을 요구했을 수 있다. 클로디우스의 야망과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극 전반에 걸쳐 분명하게 드러나며, 거트루드와의 결혼은 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른다.
3. 정서적 의존
남편의 죽음 이후 정서적으로 취약해진 거트루드는 기댈 누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닌 것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직후 재클린 케네디가 당시 법무장관이자 차기 대통령으로 떠오르던 시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존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책 <Bobby and Jackie, C. David Heymann 저(2009)>도 출간된 바 있다.
아들인 햄릿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거트루드의 ‘나약함’이란
‘정절을 지키지 못함‘, ’ 도덕적 미숙함‘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
하이라이트 장면 중 하나에서 햄릿은
"어머니 연세면 욕정도 식어 분별력이 생기게 되거늘, 어찌 그러시냐"라고
책망 섞인 울분을 퍼붓기도 한다.
#과업지향적 vs 관계지향적
흔히 말해지는 여자의 나약함은 ‘관계지향적’인 성향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대체로 남자는 과업중심적(Task-oriented)이고 여자는 관계지향적(Relationship-oriented) 성향이 두드러진다고 평가된다. 대화의 패턴을 봐도 남자는 관계가 껄끄러워지더라도 팩트 위주로 의사소통하고, 여자들은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는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적어도 관계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의 대화를 선택한다.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여성의 최대 장점 중에 하나로 꼽히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쩌면 거트루드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시동생과 관계지향적 대화를 거듭하다 어느 순간
어미로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 대가로 가장 소중한 아들과의 관계가 깨어질 걸 몰랐다면..
그녀는 나약(frail)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었다(foolish).
표지사진:Unspal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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