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겸손해지는 일, 통역과 조용한 자신감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하다 보니 매번 주제가 바뀐다.
예를 들어 지난달에는
-사찰음식의 글로벌화(종교/식문화),
-원자재 수급 (경제)
-바이오의약품 동물대체시험법(바이오)
-코호트 모델링 & 고객 세분화(마케팅)
-시스템 이관 테스트(IT)
-거버넌스 변화 관리 (조직관리)
-간섭 감지 방법론 (건축 설계)
-라이센싱 계약(미디어/법률)
-라스트 마일 최적화(e-Commerce)/수요 예측과 재고보충(e-Commerce)
-한국 방송 포맷 수출 활성화(방송/미디어) 등의 컨퍼런스와 회의를 통역했다.
난이도에 따라 몇 시간만 자료를 봐도 거뜬한 경우도 있고 일주일 내내 매달려도 안심이 안 되는 주제도 있다. 매 회의마다 나름의 ‘고충’이 있고, 같은 회의란 있을 수 없다. 늘 바뀌는 주제에 따라 공부할 내용이 달라지니 지루해질 틈이 없어서 좋으면서도 매번 ‘잘 모르는 상태’에 놓이다 보니 절로 겸허해지기도 한다. ‘통역을 한다’는 말은 그래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넉넉한 일정으로 공부할 자료를 받기도 하지만 행사 며칠 전, 때로는 당일에 받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에 맞게, 일주일이면 일주일에 맞게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흡수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할 전략이 필요하다.
지난달에 준비하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은 컨퍼런스를 예를 들어보자. 주제는 '바이오의약품 동물대체시험법'이었다. 사실 이 컨퍼런스는 부담이 되는 요소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갖추고 있었다.
1. 주제 및 용어 난이도 '상'
2. 준비소요 시간 '상'
3. 동시통역 파트너 부담 '상'
일단 주제가 만만치 않았다. 발표자료를 읽기만 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발표 자료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공부가 필요한 주제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발표 자료 하나씩 제대로 공부하는데 최소 며칠을 걸릴 것 같은데 그렇게 공부해야 하는 자료가 파트너 선생님과 반반씩 나눠서 해도 6개나 된다. 디프테리아(diphtheria), 파상풍(tetanus), 백일해(pertussis)를 비롯한 각종 질병, 박테리아이름에, MAT (monocyte activation test 단핵구 활성화 테스트), BET(bacteria endotoxin test 내독소 검사) 등 복잡한 시험법, 세계 각국의 규제기관명까지 입에 붙일 용어도 상당했다. 게다가 내 클라이언트도 아니고 동기가 준 일이었다. 동기 출장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나한테 온 일이라 일을 준 동기한테도 폐를 끼치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내용이 어려워도 일을 준 동기가 동시파트너였다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선배랑 하는 동시였다. 사실 후배랑 동시를 한다고 해서 마음이 더 편한 것도 아니긴 하다. 누구든 처음 동시를 같이 하면 서로 맞추는 데 드는 에너지가 든다. 일 외에 추가적인 에너지가 소요되다는 점에서 부담이다. 사실 동시 파트너는 일하기 편한 사람이 아니면 같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닭장’이라고 불릴 만큼 협소한 부스 안에서 초집중을 하는 일이라 숨소리하나, 연필 꺼내는 일 하나하나 조심스럽다. 15분에서 20분마다 끊김 없이 순서를 매끄럽게 바꿔가는 팀 워크도 중요하다. 물론 실력의 ‘민낯’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부담감이 전혀 없는 회의는 아주 드물다. 이 경우처럼 전문분야의 박사들로 가득 찬 컨퍼런스룸에서 통역을 하는 일은 부담감이 몇 배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담감을 최소화는 일이고, 최대한 준비해 가는 것이 그 유일한 방법이다.
1. 전체 주제 파악 (동물대체시험법을 옹호하는 입장, '어떻게 하면 전환을 가속화할 것인가'에 중점)
2. 규제기관과 바이오 업계의 입장 차이 이해
3. 주요하게 언급되는 질병들과 시험법 작동 방식 공부(동물을 사용했던 방법에서 어떤 원리로 대체되는지)
4. 주요 약어들 공부
5. 발표 자료 공부
이렇게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들은 내용’을 이해하고 통역하면 회의가 무리 없이 잘 굴러간다. 압박감의 결과가 보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통역일을 좋아하는 동료들끼리 '우리 일은 마약과도 같다'도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을 두고 하는 말일테다. 일을 할 때마다 각 주제별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게 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일을 하는 모든 순간에 각 방면의 전문가들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그들의 열정, 헌신, 깊은 통찰에 자극을 받는 일이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의 가장 큰 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모든 일을 지적 성장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세상은 광활하고, 더 많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된다.
숙련된 통역사는 기술적으로만 능숙한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호기심이 많다. 질문하고, 더 깊이 파고들며, 말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더 넓은 맥락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 하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변화에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 새로운 것, 예상치 못한 것,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개방성 유지하는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거의 모든 주제에 깊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통역사로서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게 배우고, 즉석에서 적응하며, 압박감 속에서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배움은 평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겸손하게 모든 새로운 상황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겸손함 속에는 조용한 자신감이 숨어 있다. 수년간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온갖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대처하고, 어렵고 복잡한 논의들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다. 통역사의 자신감은 '모든 것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낯선 주제라 해도 도전하고, 배우고, 적응하고,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일 시작한 지 거의 이십 년이 돼가는 지금도 부스나 회의장에 들어설 때마다 매번 겸허해진다.
동시에 오늘도 역시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나를 받쳐준다.
겸손과 자신감은 공존할 수 있다.
표지사진: Unsplash의Andhika Sor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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