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과 Unlearn의 연속, 동시통역
#유연성이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유연성은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특히 우리 일처럼 매번 새로운 주제를 만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유연성은 흔히 단순히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통역이라는 긴박한 환경에서는 훨씬 더 정교한 기술이다. 유연성은 명확성과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응하고, 새로운 정보를 즉시 관리하고, 필요시 알고 있는 지식을 재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각기 다른 주제, 용어, 뉘앙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가진 다양한 분야의 교차점에서 일하기 때문에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다.
#하얀 도화지가 될 것
통역 부스에서는 'Unknown'만이 유일한 상수이다. 용어를 공부하고 기술적인 내용을 연습하는 등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지만, 부스에 들어서는 순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갑자기 낯선 전문 용어를 사용하거나 우리말로는 잘 통하지 않는 농담을 던지는 연사를 만날 수도 있다. 유연하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전술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며, 당황스러울 때조차도 직관과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최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적응력은 사실 마음가짐에 달려있기도 하다. 유연성을 갖추려면 상대가 누구든지 매번의 만남에서 배우려는 의지와 새로운 해석과 접근 방식을 발견하려는 개방성이 필요하다.
관점의 경직성이 얼마나 우리 일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통역대학원 때 몸소 체험한 계기가 있었다. 통역대학원 시절의 일상은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스터디 파트너와 1:1 통역 연습이 대부분이다. 각자 준비해 온 텍스트를 읽어주고 스터디 파트너가 통역한 내용을 평가해 주는 식이다. 스터디 파트너 중에 한 명이 어느 날 특정 신문의 칼럼을 들고 왔다. 그 특정 신문은 내 기준으로는 정치적으로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려 있어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신문이었다. 그날 스터디는 유독 순조롭지 않았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내 마음 자세 때문이었다.
일단, 파트너가 그 신문을 가져왔다는 사실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상식적인 지식인이라면 저 신문을 구독하지 않을 텐데..’
파트너가 가져온 칼럼은 특정 사안에 대한 논평이었는데, 한 줄 한 줄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와 정반대의 견해를 노트 테이킹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머리에서도, 마음에서도, 노트를 하는 손에서도 메시지를 완고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칼럼을 쓴 사람에게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통역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파트너는 평소와 다른 내 목소리의 톤에서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을지 모르겠다.
닫힌 마음으로 통역에 임한 결과였다. 파트너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통역은 내 편견의 밑그림이 깔린 도화지가 아니라 하얀 도화지 상태로 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더라도,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통역하게 된다면 충실하게 그 의미를 전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신문은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상식적인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꽤 흥미롭다. 각자의 경험치와 가치관이 모두 다르다는 점만 기억하면 ‘부아가 날 일’도 없다.
#빠르게 Pivot 하기
통역부스에서는 연사의 말을 처리하고 올바른 대응어를 찾아 정확하게 전달할 시간이 단 몇 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용어나 개념이 준비한 내용에서 벗어날 때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힘 또한 유연성이다. 유연성은 일종의 정신적 민첩성, 즉 집중력을 잃지 않고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의지다. 언제 지식을 붙잡아야(Learn) 하고 언제 놓아야 하는지(Unlearn) 인식하여 새로운 인사이트와 접근 방식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실제 일하는 순간순간에는 준비한 용어를 활용하느냐 마느냐보다는 핵심 의미를 파악하고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명히 공부했는데 빨리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 용어를 붙잡고 있다간, 연사는 이미 다음 문장으로 한달음 내달리고 있다. 빨리 최선을 버리고 '차선'으로라도 처리하고 연사를 바짝 따라가야 한다. 빠르게 Pivot 한다는 것은 준비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를 제약이 아닌 토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준비는 맥락과 배경 지식을 갖추게 해 주지만, 그 지식을 그 순간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유연성이다
진정한 유연성은 단순히 기존 지식이나 방식을 버리는 것이 아닌, 언제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다. 통역 부스 안에서 매 순간은 예측 불가능함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준비한 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의미를 전달할 용기’를 배운다. 그 용기는 단순히 실력을 쌓는 것 이상으로, 나와 다른 견해에 귀 기울이고, 내가 속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일이다.
통역사의 유연성은 결국 그 문을 열고 나아갈 때 비로소 빛난다.
커버사진: Unsplash의Kelly Sikkema
#통역#동시통역#유연성#민첩성#Learn#Unlearn#Pivot#편견#개방성#마음자세#일